▲재담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뻑국 선생
종로문화재단
격동의 시대, 재담은 민중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풍자와 해학이 응축된 이야깃거리에 신명나는 노랫가락을 더한 재담의 재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중심에는 소리와 춤을 모두 섭렵한 종합예술인, 김뻑국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눈앞에 팔도강산이 펼쳐진다. 지역별 문화와 특산물을 쉴 새 없이 청산유수로 읊어내는 덕분이다. 60년 넘도록,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관객들을 웃고 울려온 그는 마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 자신의 인생사를 유쾌한 재담으로 풀어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17일에 진행됐다.
"재담은 코미디의 시초... 뿌리를 잊어선 안 돼"
"지금 우리가 하는 재담은 대한제국 시절, '가무별감'이라는 직책을 받고 고종황제에게 궁중연희를 올렸던 박춘재씨가 만든 것들 토대로 한 거예요. 팔도강산 전부가 재담 속에 다 녹아 있잖아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끝없이 이어지니 매일 같이 불러서 들어도 얼마나 재밌었겠습니까?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코미디와 만담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재담이 그 시초였어요. 결코 뿌리를 잊어선 안 되죠."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원폭투하를 목격한 이후 가족과 함께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어가 서툴렀던 탓에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 받기 일쑤였다. 서러운 마음에 집을 나와 무작정 올라탄 기차에서 내려보니 서울역이었다. 갈 곳 없이 떠돌다 전차를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린 그는 운명처럼 국악인 이충선을 만나게 된다.
"덩그러니 혼자 떨고 있으니 딱해 보였던 모양이야. '밥 안 먹었지?' 하고 묻는데 순간 꾀가 발동하더라고. 손짓발짓 해가면서 말 못하는 시늉을 했지. 그랬더니 자기 따라 오면 일도 할 수 있고, 밥도 굶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간 곳이 뚝섬 근방의 해장국집이에요. 거기 할머니가 큰 뚝배기에 인절미를 넣은 해장국을 주는데 맛이 기가 막혔어요. 맛있는 걸 먹다 보니까 고향에서 밥 굶고 있을 부모님이 생각나서 눈물이 절로 나더라고. 거기서 물 길어주고 심부름도 해주면서 1년 8개월을 있었어."
피리 명인으로 유명했던 이충선씨를 따라다니면서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지만, 굿판과 연희마당을 구경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용인으로 피란한 그는 빈집의 광을 뒤져 남아 있는 곡식들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연명했다.
홀로 방황하다 1953년 상경한 그는 탑골공원에서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나 장구와 피리를 배웠고, 인천과 강화 등지를 떠돌면서 약장수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씨의 공연을 보고 감동한 그는 이씨와 동고동락하며 본격적으로 재담의 세계에 눈뜬다.
"당시 민요를 잘 부르는 여자 소리꾼들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남자들은 활약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먹고 살려면 재담을 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이은관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운 거예요."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으로 불린 명무 고 김천홍 선생에게 탈춤을 사사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KBS 탤런트 겸 성우로 뽑혀 약 2년간 연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뻑국이란 예명은 그 당시, 뻐꾸기 소리를 잘 흉내 낸다고 얻은 이름이다. 본명인 김진환보다 더 널리 알려지며 활약했지만, 무대를 그리워했던 그는 다시금 재담가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