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호주에 강연을 다녔다엄마 윤정모
윤솔지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영어, 독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전 세계에 알려졌고 엄마는 일본과 호주 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기도했다.
"호주에서는 '피해국에서 소설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초청을 했어. 멜버른, 시드니, 모나쉬 대학에서 강연을 했지. 연달아 다니는 일정에 피로도가 심해 한 번은 강연 전 밖에 앉아서 깜빡 졸고 있는데 뒤통수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더라고. 그때 '아. 이거는 할머니들의 일이다. 할머니들이 일깨우는 거다. 나는 할머니들을 위해 온 거다'라는 생각에 곧장 강단에 들어갔어."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에 대해 세계 최초로 증언했다. 할머니의 용기에 더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설립자인 이효재 선생은 UN 연설을 통해 참혹한 위안부 상황을 알렸다. 2005년에 윤미향씨가 정대협 상임대표가 되면서 전 세계 피해자, 활동가들과 연대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실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물결이 넘쳤다.
"앞으로는 절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짓밟는 일이 일어나선 안돼. 식민지 당시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의 합세가 한몫했어. 우리가 이완용을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로만 알고 있지. 그 사람이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잖아. 그런 것이 더 견제해야 할 점이야. 힘과 지식을 가졌으면서 욕심과 탐욕, 개인의 이익만 있는 놈들, 그들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무섭다고 생각해. 그런 주도면밀함으로 한순간에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직도 우리는 사과 받지 못했다.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도 1392차를 앞두고 있고 생존 할머니는 이제 스물한 분 남았다. 한 분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진 세상만 사시게 하다 보내드리는 것 같아 죄책감이 쌓여만 간다. 과연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우리는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일본이라는 나라는 쉽게 사과할 나라가 아니야. 우리나라 법정에서 '불법'이라고 물어내라고 해서 지킬 놈들이겠니? 그 나라 보수의 잔인한 풍토를 봤을 때 사과할 인간들이 못돼.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기는 해. 하지만 그날은 꼭 올 거야. 우리가 기억하니까. 우리의 몫이니까."
임종국 선생은 1929년 경남 창녕태생으로 19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저술로는 <친일문학론>(1966)과 <흘러간 성좌>(1966)가 있다. <친일문학론>에서는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작가·시인·비평가들 중에서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던 인물들과 그 작품을 비판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까지 연구를 확장하였다.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내놓은 이후 임종을 불과 8개월 앞둔 1989년 3월에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친일파총서 10권 중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등 4권의 집필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병으로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로 타계한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윤정모 지음,
당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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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 그 영화는 지금도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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