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책표지
뿌리의집
- 한국전쟁 후부터 지금까지 약 20만 명의 아동들이 해외입양 보내졌다. 그 중 11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1995년까지 한국은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만나는 해외입양인들의 대다수가 한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196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에서 해외입양하면 곧 미국으로의 입양이었다. 미국도 이에 맞춰 제도적, 법적, 사회적으로 해외입양아동을 다량으로 받을 수 있는 국가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해외입양아동을 받을 여러 준비가 아직 안 되었던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신식민지적인 관계 또한 해외입양을 촉진시켰다. 한국전쟁 후 한국은 미국을 '보호자'나 '큰형'처럼 여겼고 그래서 한국아동들이 미국에서 (한국 부모가 옆에 없어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 그래서 해외입양이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 다 이득이 된 것인가?
"그렇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하에서 해외입양은 미국의 국가프로젝트와도 일치해서 정부에서는 장려하고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다. 냉전시기 미국은 흑백 인종차별 문제로 동구권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망신을 사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폭력이나 린치를 가하는 문제나 인종차별 이슈를 예로 들며 비백인 국가들인 개발도상국들에게 접근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미국은 국내의 흑백 인종차별문제를 국제적으로 희석시키기 위해 백인들은 해외에서 황인종인 특히 한국아동을 대대적으로 해외입양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외적으로 미국은 인종차별국가가 아니다라고 선포할 때 한국아동을 국제 입양한 것이 그 좋은 예로 인용되었다.
미국의 해외입양부모가 압도적으로 백인인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970년 대 부터 미국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고 페미니즘이 번성함에 따라 싱글맘도 증가하게 되었다. 그 말은 미국의 백인부모들이 입양할 백인 아동들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입양기관들은 해외입양을 위해 중상층 이상의 소득이 있는 입양예비부모를 그 자격조건으로 요구했는데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들이었다.
미국 백인들은 복잡한 이유로 국내의 흑인아동을 입양하기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한국아동이 좋은 해외입양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아동은 물론 백인이 아니었지만 흑인도 아니었다. 꿩 대신 닭이라 할까. 하여간 한국이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어떤 미국의 백인입양부모들은 해외입양을 통해 가난한 나라의 아동을 '구해준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한국정부 입장에서도 아동을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는 것이 여러 모로 이득이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해외입양은 '양공주'에게서 태어난 혼혈아동을 제거하는 길이었고 이것이 한국인의 '단일민족 순수혈통'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1960-70년 대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1980년 대 전두환 정권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복지 비용을 안 쓰고 수출주도 산업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미국에서 달러를 받고 하는 '아동수출'은 한국경제발전에 단단한 효자노릇을 했다.
그럼으로써 한국정부는 빈곤층 아동, 장애아동 그리고 싱글맘의 아동을 제도적으로 한국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 말은 한국정부가 사회복지비용으로 세금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이 지금도 막대한 국가경제규모에 비해 사회복지가 턱없이 빈약한 것은 그런 역사적 뿌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정부와 사회는 양성평등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투자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