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은 직후 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
이한열기념사업회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항쟁이 시작됐다면, 6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전국의 수많은 시민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들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머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엄마의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열이 엄마는 굉장히 빨리 상황과 정서를 파악하셨어. 바로 투사가 되어 나섬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죽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한 분이었지. 품이 넓고 포용력 있는 조용한 분이셨어. 한마디로 품위 있는 투사. 그리고 그 옆을 지키시던 문익환 목사님 등 참 이야기할 분들이 많구나.
마지막 날 아마 6월 26일이었을 거야. 시청 계단에 모여 있는데 30분 있으면 부산행 열차가 떠날 참이었지. 그때 청량리에서 연행된 대학생들이 그 열차에 타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되었어. 부산으로 보내서 구속할 참이었던 거지. 그때 김규동 선생이 기찻길에 뛰어들어 앞에 막아섰어. 그 작고 깡마르신 분이 온 힘을 다해 '날 죽이고 가!'라고 소리치셨어."
기차는 결국 떠나지 못했고 그날 밤 시민은 승리의 소식을 들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3일 후 6·29 선언을 통해 발표했다.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및 교육 자율화 실시, 정당 활동 보장, 사회정화조치 시행, 유언비어 추방, 지역감정 해소 등을 통한 신뢰성 있는 공동체 형성 등 8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 4·13 호헌조치는 철회되었고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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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람을 죽일 듯 팼어"... 이한열 열사 어머님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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