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관련 후손 기자회견에서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왼쪽 네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원봉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그 시각, 국회에서는 노덕술에 의해 '빨갱이'가 된 또 다른 이들의 후손들이 모였다. 1948년 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특별기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관계자들의 후손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지 꼭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회에 모인 반민특위 후손들은 70년 전 경찰이 자신의 조상들에게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반민특위는 왜 해체됐나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관 80여 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들은 요원들을 폭행한 뒤, 관련 서류들을 강탈하고 파기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중부서로 납치당하다시피 끌려간 특위 요원 35명은 빨갱이로 몰려 가혹한 고문까지 받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을 추적하는 특별경찰이 경찰에게 고문을 받아야만 했던 기막힌 사건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서울특별시청 경찰국 사찰과 소속 440명의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 '특별경찰대 해산' 등을 요구하면서 집단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대통령 이승만은 "민심이 소요되어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며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반민특위는 사실상 이날로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민특위 해체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경찰의 '쿠데타'가 결정적 원인이었던 셈이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아 평생 음지에 숨어 살아왔는데 반민특위를 파괴한 경찰이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속죄하면 위로가 될 것이다."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말이다.
올해로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과거사 청산'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다. 넘어야 할 문제가 첩첩산중이다. 김원봉 논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친일 경찰이 애국지사들과 반민특위를 탄압할 때 썼던 빨갱이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다.
"역사 성찰하겠다" 그 약속이 헛되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