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 공원뒤첫째 딸을 안고 친정 엄마가 용두산 공원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김정자
그 시절 사진들을 간직하고 계신 할머니들은 몇 안 되었다. 그중 피란 시절 물동이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사신 분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들었다.
피란시절 물이 귀한 산중턱의 아미동에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한다. 새벽 3시부터 양동이를 줄 세워서 물을 받아 필요한 이에게 5원을 받고 파셨다 한다. 그래도 필요한 물을 다 받을 수 없어 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는 자리까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지어 날랐다고 한다. 시댁 식구들과 한 집에서 지내며 지난한 세월을 견디셨다고 한다. 그후로도 건물 청소, 병원 청소며 일이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하셨는데, 8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청소일을 하며 지내신다고 한다.
"내 몸이 움직이는 한 내 밥 값은 해야지."
아미동 어르신들은 그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힘들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신다. 자기가 없으면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밑천삼아 물장수, 도라무깡 장수, 생선 장수, 삯바느질 등등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사진속 할머니들은 아직 앳땐 얼굴의 처녀 모습이었는데 ,이야기를 토해내는 지금은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이젠 웃고 계신다.
얼마 전엔 마을에서 단체로 치매 진단 검사를 받으셨다고 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담고, 그 기억들을 글로, 영상으로 남겨서 그 시절을 반면교사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드는 일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고갯길을 내려왔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약 4년 전부터다. 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적어 남기고 영상을 만들어 전시를 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치열한 삶속에 가족과 자식들 뒷바라지로 세월을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분들의 오늘은 과거로부터 흘러온 것이고, 남은 세월 동안 버팀목임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듯이 부모로서의 시간보다 '나'를 만나는 기회도 드리고 싶다. 할머니들이 살아내신 발자취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을 사진과 영상 전시회를 통해서 마련하고 싶은 이유다.
그러니 그분들의 기억이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겐 조급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생각난 심순덕님의 시 한 구절.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의 모습이 내딛는 발자국마다 선명히 찍혀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엄마가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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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억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과 그 기록들을 잘 담고 후세에 알려줄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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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천문화마을 건너편에 '아미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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