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가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엄마는 형사들에게 딸이 혼자 시골에 있을 수 없으니 서울로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청량리 경찰서로 구금되었고 나는 이호철 교수님 댁에 맡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항변을 하면 괜찮을 거로 생각하며 즉결 심판날만 기다렸다.
"국가원수 모독죄! 구류 7일!"
판사는 자초지종을 들어보는 솔로몬이 아니었다. 그날만 기다려오던 엄마 윤정모에게는 심히 아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바뀔 여지가 있다는 순진한 마음에 엄마는 한손을 번쩍 들었다.
"판사님! 제가..."
"구류 14일!"
"아니 판사님 어떻게..."
"구류 21일!"
말대답을 할 때마다 구류날짜는 배로 늘어갔다. 끝내 엄마는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죄명으로 구류 21일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끌려 나왔다. 그 택시기사는 정부로부터 포상금과 함께 괘종시계 그리고 개인택시 한 대를 받았다고 한다.
"유치장에서의 삶은 참 비참했어. 24시간 전경들이 배치돼 계속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랬거든. 겨울이라 수도가 얼어 물도 안 나왔어. 정말 맨바닥에서 하루하루 버티면서 지냈어. 당시 열일곱 정도 되는 매춘부 소녀가 손님이 행패 부리는 것에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나 봐. 나랑 한방에서 지냈는데 자신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덜덜 떨더라고. 그 아이와 나는 발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면서 간신히 버텼어."
지금 와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엄마는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배웠다고 하는 판사가 벌레 취급하던 그 순간이 생생하다면서.
"그래도 나는 구류 21일이 전부잖아. 다른 많은 사람처럼 고문당하고 몇 년씩 감옥살이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지. 그 시대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던 때였으니까."
우리는 다시 황새울로 돌아왔다. 한 달여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다시 학교를 나갔고 아이들은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물었다.
"엄마 감옥 갔었거든, 거기 면회 다녔어."
아이들은 엄마에 대해 묻지 않았다. 들어봤자 못 알아듣는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는 다시 아이들과 들판에서 비석치기, 자치기를 하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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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살인마" 한마디 때문에 엄마는 감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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