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와 조선 동포들의 생활 얘기를 담은 마당극, 뒤에 보이는 소녀들 사진은 조선학교의 전신으로 1946년 해방되면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소녀들 사진이다
수피아
"유치부 3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처음부터 조선학교에만 다녔다. 내가 택한 건 아니었다. 일본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내가 조선학교에 가는 것을 엄청 반대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강하게 밀어 부쳤다. 그 당시는 여자가 남자 앞에서 말대꾸 못했던 그런 분위기였는데 어머니가 학교만큼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어머닌 초등학교는 일본학교를 다녔는데 이지메(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조선학교로 갔는데 마음이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도 결국 내가 조선학교 다니면서 한국 동포들과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걸 보고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없어지고 현재 교토에 있는 조선학교는 초등학교 2개, 중고등학교 합쳐서 1개가 있다. 조선대학은 도쿄에 있는데 일본대학은 들어가기 어렵기도 하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조선대학에 가니까 너무 좋았다. 유일한 동포대학. 전국에 있던 동포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전국에 친구들이 많이 있다. 대학에서 역사를 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는 결정도 대학시기에 할 수 있었다."
본인의 소개가 끝나자 마을에서 조선인 1세대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경남(95)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강경남 할머니의 부모님은 한국에서 해방직후에 일본으로 왔다. 오사카에서 지내다가 공습이 너무 심해서 교토로 왔다가 당시 비행장 건설 때문에 조선인들이 많았던 마을인 우토로에 삶의 터를 잡으러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쓰는데 우토로에서는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여기서 일한 사람들은 원래 일본에 있었던 조선인들이다. 우토로에서 1938년 비행장 일꾼들을 모집하기 전부터 1910년 식민지 때 부터 땅 뺏긴 조선인들이 많이 건너왔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토지수탈, 쌀 공출 등을 시작하면서 민중들의 삶은 파탄되었고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본으로 가자는 분위기였다. 식민지 군대화론도 사상적 기반이 되어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잘난 문명국 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크게 달랐다. 조선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 취급 못 받고, 일본인들처럼 일 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다 1940년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그때 조선인들은 강제 징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도 돌아올수 없었던 징병. 군사시설에서 일을하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해서 우토로에 많이 몰리기도 했다."
-앞으로 우토로 마을의 계획은 무엇인지?
"식민지와 전쟁체제에서 이런 일을 해야만 했던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우토로 문제에 대해 일본인의 잘못으로만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으로 오고, 우토로에 모여야했던 현실. 일본인들의 죄가 크지만 강제징용이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종합적으로 봐야한다. 우리는 우토로 마을을 통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만들 기념관 이름도 '평화기념관'이 될 것이다. 우리 목표로는 2021년에 완공이다. "
식민지'라는 모호한 대상으로부터 나라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비행기 부품 공장을 다니며 서로 이웃사촌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정착에 대한 안심도 잠시 한국전쟁이 시기였던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며 동맹 관계가 되었고, 미국의 승인 하에 우토로 마을의 항공공업 사장은 무죄로 석방되었고, '일국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미군용 자동차와 트럭을 생산해 한국전쟁으로 큰돈을 벌었다.
우토로 주민들은 전후 일본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토지보상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일국공업은 "계속 우토로에서 살거면 돈을 내라"고 했다. 그러다 1962년 일국공업은 닛산과 합병됐고, 토지소유권은 닛산자동차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본격적인 투사가 되어 마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땅의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들은 나이를 먹었고, 조선인 1세대로 생존해 계신 분이 강경남 할머니이다. 평생을 질곡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셨을 산 증인. 2015년 방송을 통해 유재석씨가 "너무 늦게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오열을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과거 비행장 및 조종사 양성 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자위대가 들어서있다고 했다. 우토로 마을과 우지시(市를) 더 둘러보기 위해 에루화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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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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