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구려. 백하 김대락은 예순다섯에 근대의 세례를 받고 혁신유림으로 거듭나 협동학교 설립을 적극 도왔다.
장호철
생부와 스승으로부터 의절과 파문을 감수해야 했던 설립자 동산(東山) 유인식(1865~1928)을 비롯하여 석주 이상룡(1858~1932), 일송 김동삼(1878~1937) 등이 그들이다. 협동학교는 일제에 의한 탄압은 물론이고, 지역 유림의 배척을 받았고, 급기야 예천지역 의병의 습격으로 세 사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관련 기사 :
"나라 없는 몸…무덤은 남겨 무엇하겠느냐")
항일 독립투쟁 전선에 선 '혁신 유림'
이 과정에서 이들은 보수를 넘어 혁신으로 담대히 나아갔고,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경술국치(1910)로 나라를 잃게 되지, 이들은 식민통치에 협조해 기득권을 보전하는 길이 아니라 '의(義)'의 실천으로서 '항일의 길'을 선택했다. '혁신 유림'이라 불리는 이들은 사상과 방법은 달리했지만, 항일 독립투쟁의 전선에 서게 된 것이다.
일찌감치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며 독립지사를 양성하는 일에 매진한 석주 이상룡(1858~1932), 김동삼, 김대락, 유인식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 항일 활동을 벌이며 농민·노동운동을 펼친 권오설(1899~1930), 이준태(1892~?), 김남수(1899~1945), 의열투쟁에 투신한 김지섭(1885~1928)과 김시현(1883~1966) 등이 그들이었다.
안동이 낳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50여 명으로, 400여 명의 서울에 이어 전국 두 번째다. 평균 40∼50여 명에 불과한 다른 시군에 견줘 안동이 압도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혁신 유림뿐 아니라, 안동의 선비들은 보수적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자정(自靖) 순국(殉國)'하여 왕토에 사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다한 예순여섯 분 가운데 무려 열 분에 이른다. 그중 여섯 분은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관련 기사 :
장엄하여라, 우국(憂國)의 황혼이여)
이른바 안동 유림을 대표한다는 두 사람이 '구세주'로, '백 년 인물'로 칭송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평생을 공안검사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5개월간 국정을 대리했다. 그가 국정농단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구설에 오른 두 사람은 '의례적인 환영 인사'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가 궤멸해 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 줄 '구세주'…", "건국 100년, 3·1절 100년 만에 나타난 것이 황교안 대표"라는 노골적인 칭송을 '의례적'이라고 보아줄 사람은 없어 보인다.
황교안 대표를 '우리의 희망의 등불'로도, '건국과 삼일절 100년 만의 인물'로 여길 수 없다는 안동 사람들이 '안동 사람들과 안동 유림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항변하는 이유다. 더구나 이들은 유교의 종단 지도자로서 정치적 중립 측면에서도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