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엄마누군가가 흘리듯 말한 그 "대중작가"라는 한마디가 엄마의 이십대 후반을 갉아먹었다. 그 충격에 엄마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윤솔지
1970년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 스물다섯의 엄마는 문학소녀의 꿈을 안고 서라벌예대를 졸업했다. 그러나 생활이 녹록지 않은 탓에 출판사에 근무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외할머니, 어린 삼촌들 등 먹여 살려야하는 가족은 많았지만 짐을 같이 덜어줄 친척은 적었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잘 팔릴 만한 글을 썼고 대중작가가 되었다.
'대중작가 주제에...'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 평론가들은 엄마에 대해 지나가듯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충격에 엄마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길을 걸으면 건물이 무너질 것 같고 계단을 오를 때면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가 흘리듯 말한 그 '대중작가'라는 한마디가 엄마의 이십대 후반을 갉아먹었다.
"맞지 뭐. 대중작가였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에 들어있는 느낌이 뭐랄까. 내가 이 세상에 커다란 공해가 된 것 같았어. 화를 낼 수도 견딜 수도 없어서 병원에서 입원해 있었고 몸무게는 38키로 아래로 떨어졌지."
우연한 계기... 한센병 환자들에게 받은 치유
엄마는 일하던 출판사도 관두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한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엄마에게 한센병 환자들을 도와주고 있는 유판진씨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마음이 조금 치유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시 유판진씨는 전주에서 미감아(한센병환자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를 위한 고아원과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유판진씨는 본인이 한센병에 걸린 적 있었어. 그 때문에 환자들이 소록도로 끌려가 격리되고 고통받는 것을 직접 목격했지. 그는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도 걱정했지만 이들이 낳은 자식들의 미래를 더 걱정했어. 미감아 아이들이 처절하게 소외당하고 쫓기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보호해야 겠다는 생각에 학교와 고아원을 세운 사람이야. 정식 초등학교로 인가도 받고 문제없이 중·고등학교로, 또 사회로 보내는 게 그 분이 하는 일이었어."
문둥병이라고 불리던 한센병은 '하늘에서 내린 천형'이라고들 했다. 떨어져나가고 무너진 외모의 그들을 만나는 것은 웬만한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고는 마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죽기 전에 꼭 한번 좋은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던 엄마는 유판진씨가 있는, 미감아 학교가 있는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미감아 4학년 아이들을 1년동안 가르쳤어. 열한 살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었어. 아이라면 투정도 부리고 서로 싸우기도 해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 게 없었어. 한쪽 날개가 없는 것이 느껴졌지. 천방지축이 없었어. 월급을 탈 때면 빵을 잔뜩 사서 아이들과 들에 나가 먹으면서 노래 부르며 놀았었는데 그때 큰 치유를 받았어."
미감아 아이들을 만나고 1년동안 지내면서 한센병에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엄마는 소록도를 자주 방문해서 친구들을 하나 둘 만들었다.
"작은 사슴처럼 슬픈 눈망울의 아름다운 섬, 이게 소록도의 뜻이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누군가들을 격리하기 딱 좋은 곳이었겠지. 그곳의 사람들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았지.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해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한결같이 고결할 수 없어. 운명에 대한 분노도 초월했다고 할까. 소록도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무척 반갑게 맞이하고 친구가 되어줬어. 그렇게 다니다 보니 일제시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항쟁사를 알게 되었지."
한센병은 정치 싸움에 이용될 단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