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익살에 '눈물바다' 대신 '웃음바다'4.24재보선 투표일인 지난 2013년 4월 24일 오후 서울 노원구 마들역 부근 진보정의당 김지선 후보(노원병) 선거사무실에서 열린 해단식에서 노회찬 전 의원이 부인인 김지선 후보와 포옹을 하던 중 춤을 추는 포즈로 익살을 부리자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권우성
노회찬은 수배자의 처지에서 김지선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의 주선으로 피신하면서 1년만인 1988년 12월 결혼한다. 아내는 1954년생으로 남편보다 두 살 위였다. 두 사람은 노동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알게 되고 가치관이 같아 부부가 되었다. 이후 노회찬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아내와 결혼한 일을 꼽았다.
이들 부부의 신혼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다. 신혼방은 부모님이 인천에 마련해준 17평 아파트에 꾸릴 수 있었다. 집은 마련했으나 가재 도구 등은 이웃들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주워다 썼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한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지명수배 때문이었다.
노회찬은 지하 생활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인민노련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국가보안법위반 혐의였다. 독재자들은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자들을 걸핏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엮어 탄압했다.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터라, 그에게 구속은 크게 겁먹은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어렵게 일을 하다 보니까,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보다는 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데에 너무 매몰되어온 건 사실이에요.") "제가 가장 문제 있다고 여기는 자세가 뭔가 하면, 나는 감옥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감옥가는 걸 감수하거나 감옥 가도 변치 않겠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좋은 태도긴 하지만 사실 감옥 간다는 것은 진다는 얘기거든요."
"당하지 않고 적을 무찔러야 되는데, 무찔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포부보다는 패배주의가 앞서거든요. 그건 생존을 위한 철학은 될지 몰라도, 변혁을 위한, 변화를 시키는, 이겨야 변화를 시키는 건데, 그 길은 많이 못미치는, 그런 점에서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렇게 때문에 행태나 운동방식도 그걸 못벗어나고 있다" (주석 8)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의 청산은 아니었지만 독재 권력이 다소 약화되고 있던 시점에 33살의 노회찬은 신혼의 아내를 황야에 남겨둔 채 투옥되었다. 검찰은 인민노련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판사가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기소장과 판결문이 별로 다르지 않았던 시절이다. 1992년 4월 출소할 때까지 2년 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진보 운동을 멈춰야 했다.
양심수들의 행적이 그렇듯이 노회찬의 옥고도 그의 신념이나 투지를 묶거나 바꾸지 못하였다. 양심수 중에서도 국보법 위반자는 교도소에서 특별관리의 대상에 속한다. 가족과의 편지나 면회, 차입 도서 등에서 간섭이 여간 심하고 수형실도 햇볕이 안 드는 곳에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