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서귀포 서남쪽에 위치한 올레 10코스. 사계 해변 쪽에서 송악산을 둘러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 모슬포항까지 이어지는 동선이다.
장은미
백사장이 있는 하모 해변에서 시작된 올레길 초반에서 일행들은 '재밌는 장치'를 하나 만났다. 나뭇가지를 엮어 공중에 간이지붕을 만들고 사람들이 터널처럼 통과할 수 있게 한 곳이었다. 올레길을 좋아하는 한 남자가 올레꾼들에게 볼거리를 주고 싶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이렇게 좋아하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바로 올레길"이라며 미소 지었다.
출발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찻길을 건너 널따란 무밭을 지나자 첫 번째 비극의 역사 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약 80만 평 규모로 펼쳐진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이라는 뜻이에요. 일제 강점기에 중일전쟁을 대비해서 이곳에 비행장을 조성했어요. 지역 주민들에게 좁쌀밥 한 덩이와 곡괭이를 쥐여주었죠. 그들이 맨손으로 지은 곳이에요. 스무 개가 넘는 비행기 격납고가 이곳에 있는데 동굴 같기도 하고 설치 미술 같기도 하죠? 일본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면 제주도가 전쟁터가 됐을 거예요."
알뜨르 비행장 인근에는 최평곤 작가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9m 높이의 '평화를 염원하는 소녀상'이 있다. 또한 제주 4.3 사건 때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용공 반란자'로 몰려 학살된 섯알오름도 있다. 서 이사장은 "이곳에서 군인과 경찰이 구덩이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어 마구잡이로 사살했는데 6년 후에 보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뼈가 다 엉겨 붙어서 구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때 수습된 유해들은 '백조일손(百祖一孫)'으로 불린다. 백 명 넘는 사람들이 같은 날 죽고 함께 묻혀 무덤과 제삿날이 같으니 그 자손이 하나라는 뜻이다.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제주의 '속살'
비극의 현장들을 뒤로하고 오르막을 조금 걸으니 '인생 사진'을 찍을 만한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졌다. 푸르른 목초지와 파란 하늘, 쪽빛 바다가 송악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서 이사장은 "천천히 걸으며 이런 풍경을 봐야 제주도의 속살을 봤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지난해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열린 '2018 월드 트레일즈(오솔길) 컨퍼런스'에서 월드 트레일즈 네트워크의 초대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41개국에서 트레일 전문가 등 200여 명이 참가한 이 행사에서 서 이사장은 수락 연설을 통해 '피스(평화) 올레'를 제안했다. 남과 북을 잇는 길을 포함해 세계 분쟁 지역에 평화의 길을 만들자는 의미였다.
이 제안에 참가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고 한다. 서 이사장은 "연설을 마치고 나오니 여러 나라 대표들이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결 등 저마다의 피스 올레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서 이사장의 부친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실향민이다. '피스 올레'는 가족의 간절한 꿈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입버릇처럼 '통일만 되면 가족들과 목포에서 이북 고향까지 차로 쭉 달려서 간다'는 말씀을 하셨죠.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제가 이뤄드리고 싶어요. '한라에서 백두까지' 걸어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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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북 잇는 '피스 올레'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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