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할아버지 유품들 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변영숙
할아버지는 석탄난로 외에는 별 다른 난방기구도 없는 허름한 판잣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사할린에 와서 만나 결혼한 아내는 201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다섯 자녀가 있지만 모두 독립했고, 막내딸이 근처에 살면서 가끔씩 들른다. 좁은 실내와 낡은 가구들, 옹색한 살림살이, 남루한 옷차림에서 할아버지의 평생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음식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흰쌀밥, 김치, 생선튀김, 깻잎 장아찌,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밥상이다. 염치없게도 그 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던지. 식사를 마치고 비좁은 거실에 빙 둘러 앉아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는 1923년 경북 경산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 앞으로 강제징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대신해 징용길에 올랐다.
"일본시대에 왔지. 왜놈들이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를, 동네 군마다 하나면 하나, 둘씩 징용 보냈지. 그때 뭐 왜놈들 징용 안 가면 쮸리마 보내고.(*쮸리마는 러시아어로 '감옥'이란 뜻이다.) 그러다보니 안 가면 안돼서 내가 대표로 왔지. 내 올 적에 아버지 대신 오다 보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했지."
김 할아버지가 사할린에 온 것은 1943년 17살 되던 해였다. 부산과 일본을 거쳐 사할린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다시 이곳 시네고르스크 탄광으로 보내졌다. 그때부터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컴컴한 굴 속에 들어가 탄을 캐는 고단한 광부의 삶이 시작되었다.
"여기 봐, 전부 새까매. 모두 굳은살이 됐어. 생전에 다시는 그런 탄광에서 일 안 하지. 그렇게 우리 고생한 사람들이라고. 다신 안 하지. 아주 말할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