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14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한미 정상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회견 도중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23일 봉화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한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 후 화가로 활동해 온 그가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도 전달하고, 재임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얘기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고비에서 여러 차례 함께 마주 앉아야 했던 정치인들의 인간적인 인연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처럼, 이 방문 소식은 퍽 훈훈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때 한반도와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저 그런 개인적 후일담으로 처리해버려도 좋은 것일까?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역사와 세계사에 회복하기 힘든 상흔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유산이 아직도 지속적인 분쟁과 적대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 조지 W 부시는 2000년 12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즈음 한반도는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 과정과 세계사적 탈냉전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2000년 6월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일 군사위원장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남북 간의 해빙이 본격화됐다. 이 역사적 전환에 힘입어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 북한 정권 간에도 '북미코뮤니케'라는 포괄적인 관계개선 합의가 성사됐다. 50년여 동안 이어져온 북미 적대관계가 청산되기를 기대하던 때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한반도의 봄은 채 6개월이 이어지지 않았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신임 부시 대통령은 북미코뮤니케를 존중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남한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9.11 사태 직후 부시 대통령이 취한 대외 정책은 한반도와 전 세계를 큰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이듬해 초 부시 행정부는 북한, 이란, 이라크를 3대 악의 축으로 공표하고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언급했다. 1993년 북미 제네바합의는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NSA)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그 전제를 허물어뜨린 것이다.
2002년 10월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문제를 제기하며 무력에 의한 해결 가능성을 언급했다. 당시는 이미 미국이 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약속을 파기한 상태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경수로 건설 지원도 지체되고 있어서 북한의 고농충 우라늄 개발만을 문제 삼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북한의 악행 탓으로 몰아갔다. 한반도 화해협력 분위기는 일순간에 전쟁 가능성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에 할 말 한다'는 젊은 노무현의 등장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F-15전투기의 구매와 MD 참여,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F-15전투기 40대(40억 달러 규모)를 구매했다. 또한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 직후 아프간에 400여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대테러전쟁' 참전국가가 되었다. 영국이 공식 참전하기까지 한국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2002년 6월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그해 11월, 이 사건에 대해 미군법정이 무죄로 평결하자 그간 한미관계에서 누적된 불만이 촛불집회로 터져 나왔다. 이는 지난 50여년간 누적된 한미 간 불평등 관계에 대한 정상화 요구이자 부시 행정부 이후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공약한 젊은 노무현 후보가 매우 불리한 환경을 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직면해야 했던 것은 아프간 파병에 이은 이라크 파병, 북한제재 공조, 그리고 한미군사동맹의 지역/지구적 범위에서의 역할 확대에 관한 미국의 압박이었다. 3대 악의 축으로 부시 행정부가 지목한 세 나라 중의 하나인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을 도우라는 일방적 요청은 이라크 외에 북한도 공격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들리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라크 전쟁은 아프간 전쟁과는 또 다른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었다. 이라크는 부시 미 대통령이 지목한 소위 3대 악의 축의 하나였는데,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고, 테러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