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행사에 참여한 서유진일행들2003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된 5.18 세미나후 서유진선생이 조지 카치아피카스교수, 나간채교수, 산지와 리아나지 아시아인권위 국장, 김영집, 박재만, 김수아와 외국인 참가자들이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김영집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청년기부터 긴 세월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망명한 김대중 대통령, 문동환 목사와 그 주변 인사들을 돕기 위해, 재미동포 조직에서 청년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온 것 같았다.
그는 미주 민주회복통일연합에서 활동하며 80년대 초 5․18 광주 학살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김근태 선생이 고문 받고 민청련 민주투사들이 시련 받았을 때 뉴욕에서 캠페인과 모금을 하며 미국 언론에 진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그는 한국 민주화에 호의적인 에드워드 케네디·바바라 미컬스 등 미국 의원들과 교류하면서, 김대중과 민주화운동가들을 돕기 위해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가했던 전설적인 활동들에 대해 종종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누구에게 아부하거나 하지 않았다. 잘 나가던 전주고 동문 출세자들 옆에 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정치활동에 누구보다 분개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부인과 함께 일해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자신이 이런 활동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부인이 생계를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술에 취했을 때 가끔 그는 가족의 이야기를 절망에 빠진 채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선생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95년에 통일 운동으로 감옥에 잠시 들어가 있을 때 선생이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저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 원서를 구해 광주교도소에 넣어주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영어를 검열할 수 없었던 교도관들은 한동안 도서 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력하게 항의하자 결국 허가해 준 기억이 생생하다.
광주시민연대모임과 5․18 국제화 사업 시작
그 후 1996년 서유진 선생, 이재의, 나 셋은 윤장현·오수성·정찬용씨 등이 이끄는 '시민연대모임'이 벌인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청년캠프'에서 5․18을 알리는 국제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캠프는 5․18 정신의 국제적 계승사업의 일환으로 5․18 주간에 개최한 행사였다.
선생은 해외 연락과 방법을 코칭했고, 이재의씨는 기획을, 나는 전반적 사무를 총괄했다. 당시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참여하여 광주에서 일주일간의 캠프를 거쳐 갔다. 아직도 독재에 억압받고 있는 동남아 서남아시아 국가들에게 광주 5․18 정신과 운동 모델을 제공했다는 의의가 있는 행사였다.
그때 콩고 출신의 유엔인권운동가였던 움바야 교수(나중에 콩고민주정부 법무장관), 필리핀 민주화운동가로 아시아태평양평화군축회의 의장이었던 로물로페랄타씨 등이 선생과 함께 시니어 그룹으로 참여해 청년들을 격려했다.
이 캠프가 계기가 되어 시민연대모임은 1997년 5월 <5․18 특파원 리포트>를 간행했다. 선생은 브래들리 마틴 기자, 뉴욕타임스 서울주재기자였던 심재훈 기자와 연락해 5․18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특파원들을 찾아내 생생했던 기록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었다.
광주와 아시아 오가며 5․18 전도사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