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문익환의 방북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은 1950년대 이후 계속되어온 동서 양대 진영의 이념적 대결구도에서 화해와 협력 등 새로운 데탕트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평화전략과 미소간의 긴장완화로 동서화해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다시말해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반으로 줄이는 등 군비경쟁을 늦추고 중거리 미사일 폐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당시 미소는 신데탕트체계를 이어갔다.
한편 이런 상황속에서 노태우는 1989년 1월 1일 아침 "새해에는 남북한을 차단하는 대결의 장벽을 허물고 평화통일의 전기를 이룩할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고, 동시에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간평가 연기는 통일을 반대하는 보수층을 결집하게 되었고, 이에 맞서 민간통일운동을 추진했던 진보세력도 돌파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김일성은 1989년 신년사를 통해 각당 총재와 문익환, 백기완, 김수환 등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 문익환은 방북을 고심하면서 '나는 올해 안에 평양으로 갈 거야'라는 시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익환에게 있어서 1989년 방북의 결정적인 동기는 '학생들의 수난'이었다. 즉 이동수, 조성만 등의 학생들이 통일을 외치며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생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는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익환은 남북학생회담과 평양축전을 요구하는 젊은 학생들의 투쟁과 좌절을 보면서 자신이 나서야겠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사실상 정부는 1988년 7.7선언을 통해 북한과 인도적 교류를 도모하고자 했지만, 남북교섭 창구를 정부로 일원화하는 창구단일화 원칙으로 민간통일운동을 단절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7.7선언에 대한 실질적인 이행이 없었다. 이에 문익환은 1989년 4월 베이징 국제클럽 기자회견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는 남북교류가 정부의 전유물이 아닌 민간차원에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와는 상호보완하면서 민간인만이 할 수 있는 민간차원의 기여를 한다는 심정으로 방북을 결행했던 것이다.
1989년에는 동구 및 미소 화해 분위기인 신 데탕트 조성과 남한은 북방정책 일환으로 대북포위 및 개방화를 위한 북한과 대화를 원했고, 이에 발맞추어 북한도 남북정당 및 민간단체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하에서 전민련 고문이었던 문익환은 남한의 재야통일운동의 대표자 격으로 정경모과 유원호의 도움을 받아 방북을 결행했다.
'민중의 통일의지 결집시킨 행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