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바웃 타임> 스틸 이미지. 호텔에서 내가 본 게 딱 이 장면 같았다.
유니버설 픽쳐스
'어머나 이게 뭐야?' 텔레비전 화면에는 남녀가 상의를 벗은 채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이름은 호텔이지만 실체는 모텔이라는 사실이 내 뒷통수를 강타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남녀가 몸짓 대신 '대화'를 하고 있던 거라는 거.
내 등뒤에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엄마는 등 뒤에도 눈이 달려 있어서, 니들이 뭐하는지 다 알아"라고 호통치던 나는 갑자기 세상 작은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어머어머머머머 뭐니, 이거 뭐니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뭘 눌러야 해.'
머릿속은 백지 상태였다. 리모컨 버튼은 온통 암흑 투성이였다. '내 등짝으로 이 큰 텔레비전 화면이 가려질까? 애들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려나.' 오만가지 생각이 출몰하던 그때, 부드럽고 간결하고 단호한 구원의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었다.
"외부입력을 눌러."
"외부입력? 그게 뭐야?"
남편이 누르라는 걸 누르니, 그제야 상의를 벗은 남녀가 사라졌다. 1분이 1시간 같았다. 혼미해진 정신이 돌아왔다. 신기한 건 나는 혼자 속으로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는 거. '못 본 건가? 무슨 생각을 하려나?' 아이들에게 뭔가 아는 척 하며 말을 하려다 말았다. 평소 똥, 방귀, 키스 이야기는 오히려 '오버'해서 설명하던 내가, 성관계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중에 남편과 호텔에서의 '벗은 남녀' 상황에 대해 말했는데, 남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음... 애들은 괜찮았는데, 자기가 안 괜찮은 것 같더라."
"아, 정말 내가 뒤를 돌아볼 수도 없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애들 괜찮았을까?"
"별 장면도 아니었는데 뭐. 그냥 뭐. 괜찮았어."
정말 괜찮을까. 아니 뭐,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응응?
- 심쌤! 제 이야기 잘 들으셨죠?
"워워, 진정하세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당황을 하시다니욧!"
- 머리로 아는 거랑 실전은 너무 달라요. 흑흑.
"다른 사람들 역시 기자님과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겪고 또 그때마다 당황하게 된다고 해요. 아이들과 함께 TV나 영화 등의 미디어를 접할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아요. 언제, 어떤 장면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또는 준비가 될 때까지 민망한(?) 장면이 나올 것 같은 영화는 피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하지만 계속해서 아예 못 보게 하거나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 아이들과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성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놓치게 될지 몰라요."
섹스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줘야 합니다, 제대로
- 청소년기에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사랑의 표현을 그땐 보면 절대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에 이야기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기억 나세요?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지만 영화에서 다뤄진 동성애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했잖아요. 평소 먼저 꺼내기 어려운 주제를 영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했을 때 아이들의 생각을 묻고 들으며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죠."
- 네, 기억나요.
"이번과 같이 예상치 못한, '섹스'를 연상시키는 장면 역시 그런 기회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섹스'는 몸, 젠더, 인격, 생명 등 우리 삶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말하기는 꺼려지고 있어요. 또 잘못된 정보로 왜곡되고 편견에 휩싸이기도 쉽죠. 또 어쩌다 한번 받게 되는 성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갖기도 어려워요.
그래서 아이들이 일상에서 자주 만나고 보고 접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꼭 부모님이 아니어도 되고요. 그러려면 우리 개인이, 사회가 먼저 인격적이고 즐거운 성적 가치관을 가져야 할 거 같아요. 또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담담하게 일상의 언어로 전달할 수도 있어야 하고요. 누구라도 아이들에게, 나아가 서로에게 좋은 성교육 친구가 될 수 있도록요."
- 쩜쩜쩜.
"이 반응은 뭐죠?"
- 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을 때, 아이들이 "쩜쩜쩜" 하더라고요.
"참 기발한 표현인데요! 저도 곤란할 땐 '쩜쩜쩜' 해야겠어요. 어른들이 섹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미 표정으로, 뉘앙스로, 분위기로 무수히 많은 '쩜쩜쩜'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성' 혹은 '섹스'란, 부끄럽고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라는 편견을 심어주었을 수도 있죠. 어른들도 자라면서 그렇게 느껴 왔고요. 언젠가 경험하게 될 일이라고 해서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특히 성불평등한 가치관이 여전한 사회에서는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섹스라도 고정되고 통념적인 성역할에 갇히기가 쉬워요. 아이들도 '섹스'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필요가 있는 이유에요."
- 섹스가 뭔지, 제대로 알려주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이미 검색어나 광고, 유튜브 광고를 통해 '야동'을 본다고 해요. 일부러 검색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두 명이 '야, 같이 보자' 하면서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거죠.
"맞아요! 게다가 야동을 통해 섹스를 배우게 될 땐 방금 말한 고정관념이 더 강화되기 쉬워요. 나와 상대가 정말 원하고 서로에게 잘 맞는 섹스를 알기도 전에 야동이 말하는 시나리오대로 섹스, 성역할, 판타지에 영향을 받아 그대로 따라하기에 바빠지니까요.
특히 우리나라 야동은 대부분 남성 판타지 중심이기 때문에 강간 시나리오, 과하게 부각된 여성의 몸매, 수동적이지만 결국엔 쾌락 앞에 굴복하는 여성 이미지 등을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그걸 여성이 좋아할 거라고 여기고, 여성들 역시 남성들은 야동에서 보여주는 섹스만 추구한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섹스에 대해 제대로, 솔직하게 듣고 이야기 하고 자신의 욕구와 취향 등에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면 살면서 원치 않는 방식의 섹스를 경험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