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금진 ⓒ 이상옥
그는 차가운 돌 속에 박히기로 했다
사람들은 지나갔다, 멈추었다, 그리고 그를 읽었다
그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시가 되었다
-최금진 디카시 <시인>
수많은 시를 생산해 내면 시인 자신도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시가 되었다"라는 언술은 시를 생산해 낸 시인 자체가 시가 되었다는 말이니 그렇다.
실상, 시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상의 미적 기호이다. 짧은 발화로 때론 천기를 누설하기까지 하는, 시만큼 매혹적인 장르가 있겠나 싶다. 그런 시를 생산해 내는 원천인 시인은 또 어떤가.
시인은 좋은 시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 천문지리를 통달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구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시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 터이다. 이 디카시에서 시인이 차가운 돌 속에 박히기로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를 생산해 내는 시인은 왜 차가운 돌 속에 박히기로 한 것일까? 스스로 고통 속으로 침참해간 것은 역시 시의 생산과 관련이 있다. 차가운 돌 속에 박힌다는 것은 천년의 고독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돌 속에 박혀 스스로 돌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돌이 되어서 오로지 시로써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돌 속에 박힌 시인을 지나가다 멈춰서서 그를 읽는다. 시인이 쓴 시를 읽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 속에 박힌 시인이 쓴 수많은 시들을 읽는다는 것은 시인을 읽는 것이고 시인이 바로 시인 것도 알게 된다.
시인이야말로 매혹적인 기호이다. 수많은 시를 생산해 생산해 낸 시인의 얼굴은 그가 생생해 낸 시를 아우라로 거느리고 있다. 그 얼굴을 보면 그의 시가 보인다. 아니, 시인의 얼굴 자체가 시인 것이다.
디카시로 쓴 시인론.
따지고 보면 시인의 얼굴만이 시는 아니다. 무릇 사람의 얼굴은 살아온 생의 무게가 담긴 시라 해도 좋다. 때로 그것이 비극적인 시라 할지라도 말이다. 한 생을 살아낸 노인의 얼굴만큼 장엄한 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최금진의 디카시 <시인>은 디카시로 쓴 시인론이다. 시인의 얼굴 형상이 보이는 사진 이미지와 그걸 의미화한 문자가 하나의 택스트가 되어서 뿜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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