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1895~1900년경)
오르세 미술관
흘러내리는 흰 식탁보와 그 위의 단단해 보이는 과일들. 맨 앞 사과 한 알은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다. 정돈되지 않은 배경에 그려진 과일임에도 선명하고 시선을 흐트러짐 없이 사로잡는다.
물병에 새겨진 그림은 주변 과일들과 뒤에 있는 다채로운 문양의 소파 커버를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아래로 향하는 흰 식탁보와 위로 솟은 과일 그릇은 대비를 이뤄 균형감이 있고, 오브제의 위치도 단조롭지 않으면서 좌우 구조적으로 잘 배치됐다.
좀 더 들여다보니 뒤쪽에 오렌지가 담긴 채로 솟아 있는 접시와 물병은 옆면을 바라보는 시점인데, 바로 앞 사과 접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원근감도 없어 그림이 평면적이다.
우리는 이미 피카소나 브라크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통해 복합 시점과 평면적인 그림들을 접해서 이런 그림이 어색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 작품은 그들 이전에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진 같은 정물화만 봐 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을 테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가장 사과다운 사과
이 작품은 폴 세잔(1839~1906)이 그린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이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더불어 회자되는 세잔의 사과는 도대체 무엇이 특별한 걸까. 그리고 세잔은 어떻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가 됐을까.
사과 한 알로 파리를 깜짝 놀라게 하다고 공언한 세잔은 그의 말대로 파리뿐 아니라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그런 세잔의 사과 정물화가 여타의 정물화와 다른 점을 알려면, 우선 그동안 그려진 정물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잔 이전의 정물화는 그 소재 자체의 본질보다 상징성에 방점을 뒀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삶이 짧고 덧없음을 나타내는 해골, 유리잔, 책, 깃털 등이 소재로 쓰인 바니타스 정물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유리에 비친 대상까지 그대로 묘사해 사진보다 더 실제 같은 극사실주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보고 있자면 실물과 너무 똑같아서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그런 작품들.
그런 그림들이 정물화로 인정받는 시대에 뜬금없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원근감도 무시하고 시점도 중첩된, 하지만 구성과 색채 면에서 너무도 단단한 그런 그림이.
세잔은 각 소재가 지닌 형태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다중 시점을 사용했고 그림이 3차원 입체가 아닌 2차원적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원근감을 없앴다. 낯선 것에 대한 비난이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대상을 복사하듯 똑같이 그리지 않는 그의 시도는 미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그리려는 대상을 천 번을 보고, 백 번을 그리고, 백 번을 고치는 화가다. 그가 자화상을 많이 그리거나 사과나 오렌지, 혹은 레몬과 같이 외피가 단단한 소재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변치 않아야 하니까.
사과를 눈앞에 두고 바라본다. 며칠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밥을 먹고 다시 보고, 산책하고 돌아와 다시 보며 사과라는 본질을 파악할 때까지 세잔은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무릇 사과란 이런 것'이라는 학습된 이미지가 아닌 '자신이 보고 느끼고 체득한 사과'를 그렸다.
원근이나 시점은 의미가 없다. 대상을 똑같이 그리지 않고 사과를 가장 사과답게 보이게 하는 색채와 각도, 그리고 안정감 있는 구도만이 그에게 중요하다. 극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그의 특별한 사과가 탄생했다.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은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
세잔과 에밀 졸라, 그리고 파시로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아래 엑스)에서 모자 가게 상인인 아버지와 점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밑으로 두 누이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모자로 돈을 벌어 당시 그 지역에 하나뿐이던 은행을 인수했다. 덕분에 세잔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부르봉 중학교에 입학한 13세 무렵, 그곳에서 한 살 아래인 에밀 졸라를 만나 우정을 키운다. 두 소년은 바늘과 실처럼 항상 함께 동네 뒷산을 산책하고 수영을 하고 책을 읽으며 '절친(절친한 친구)'으로 40여년을 보낸다. 그 무렵 세잔은 엑스의 미술학교에서 조제프 지베르니에게 그림을 배운다.
졸라는 18세에 파리로 이사하면서 둘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세잔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엑스의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졸라의 제안과 설득에 힘입어 3년 후 세잔은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향한다.
1861년, 6개월 동안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Academie Suisse)'에서 그림을 배우며 피사로, 기요맹 등의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낙방하자 크게 상심해 낙향한다. 엑스로 돌아온 세잔은 아버지 은행에서 일했지만, 화가의 꿈을 도저히 접을 수 없어 다음 해 다시 파리로 간다.
십여 년 동안 세잔은 파리와 엑스를 오가며 그림을 그린다. 국선인 살롱전에 번번이 낙선했고 외골수적인 성격 탓에 동료 화가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이 시기를 '세잔의 암흑기'라 하는데, 그림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주제도 죽음, 강간, 살인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의 그림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그보다 9살 연상인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고부터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알려진 피사로는 세잔의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봤다.
피사로는 세잔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퐁투아즈로 초대했다. 퐁투아즈는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풍경 화가들을 위한 소재가 풍부한 곳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돼 있던 세잔은 피사로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자신의 예민함과 까다로움을 모두 받아준 그에 대해 세잔은 이렇게 회고했다. "피사로는 내게 아버지와 같다. 거의 자비로운 신과 같다."
'자연을 주의 깊고 성실하게 관찰하라'라고 강조한 피사로는 세잔의 팔레트에서 어두운색을 제거하고, 3원색(빨강, 노랑, 파)과 이에 파생된 색 사용을 권장함과 동시에 그를 독려했다.
"우리의 친구 세잔은 우리의 기대를 높인다. 나는 괄목할 만한 활력과 힘이 느껴지는 그의 그림을 보아왔다. 바라건대, 그가 오베르에 얼마간 더 머물게 된다면, 그를 성급하게 비난했던 많은 예술가를 놀라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