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도 다녀왔다
이은혜
하지만 내가 몸 담았던 방송은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 여전히 방송은 잘 진행되고 있고, 달라진 것이라고는 방송 말미 작가 소개에 내 이름이 빠졌다는 것 정도. 그 미세한 차이뿐이다.
잘리고나서 여행부터 원예까지 바쁘게 보낸 데는 다소 불건전한 이유가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공연히 부산스럽게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쓰는 행위'를 멀리했다. 쓰려면 생각을 해야 하고, 생각을 하다 보면 다시 마음이 쓰리니까.
여행을 가서도 펜을 들지 않았고, 책을 읽고 나서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부유하는 먼지처럼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 좀 정신이 든다. 결국 기록하지 않으면 휘발되는 것이다.
그날의 기억
몇 주 전. 방송이 끝나고 원고를 정리하는데, 피디가 잠깐 따로 이야기를 하잔다. 얼마 전 인사 이동으로 이 프로그램을 맡게 된 신입 피디였다. 이 자리에서 할 건지, 커피숍에서 할 건지를 묻는다.
이야기 내용을 짐작도 하지 못하던 나는 기왕이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하자고 바깥으로 나갔다. 커피숍에 가서는 가지고 있있던 쿠폰을 내밀었다. 제작비도 빠듯할 텐데 돈을 쓰게 하는 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피디가 물었다. "옛날에 계시던 작가님들이 어떻게 나가게 됐는지 아세요?" 마음이 싸하다. 손 끝이 차가워진다. 그러더니 계약서에 명시된 1년만 채우고 그만 해달란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듣는 건지. 심호흡을 하고 이유를 물었다.
"제 원고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아닙니다. "
"그러면 사유가 뭔가요?"
"윗선에서 결정한 일이라..."
일개 한 작가의 거취가 뭐라고 '윗선'에서 결정한다는 말인가. 후에 다른 스태프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윗선의 결정'이라는 건 없었다. 아마 피디가 나와 업무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나는 평소 덤덤한 편이다. 언젠가 살면서 이런 통보를 받는다 해도 눈물은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애착과 아쉬움은 비례한다는 걸 왜 몰랐던걸까.
1년 동안 열심히 갈고닦아온 프로그램이었다. 직접 고민해가며 코너 아이디어를 내고, 새 단장해서 반응이 좋으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원고를 쓰지 않는 시간에도 일을 생각했다. 진행자가 쉴 땐 쉬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다음 주까지만 나와 달라니. 당장 내일부터 나는 어떤 얼굴로 어떻게 앉아있어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쏟아온 애정과 노력이 계약 만료와 어떻게 닿아 있는 걸까. '커피숍 면담' 이후로 나는 그냥 사라질 수밖에 없는 건가.
스태프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일주일 동안 버텨야 한다니. 청승도 청승이지만 그 아쉬움을, 그 황망함을 어떻게 달래야 한단 말인가. 피디에게 부탁을 했다. 조용히 나가게 해달라고.
자리를 뜨며 피디가 물었다. "작가님... 운전은 하실 수 있겠어요...?" 네. 그럼요. 지금 당장 집에 가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집까지 운전해서 가야지요. 부디 운전 걱정일랑은 넣어두시고 잘리는 이유나 알려달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나와 그 프로그램의 인연이 끝났다.
커피나 한잔 하며 하자던 이야기는 결국 그러니까, 해고 통보였던 거다. 너털너털한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식탁 위에 가방을 올리려다 또 마음이 내려앉는다. 식탁에는 코너 아이디어 회의용 페이퍼와 프로그램 원고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