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반니
부상을 야기한 원인은 분명 위험한 캔 뚜껑에 있다고, 캐스린 H. 앤서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에서 주장한다. 캔 뚜껑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내 지인들은 다행히 손가락을 잃지는 않았지만, 나쁜 디자인의 피해 사례는 매우 심각하다.
"우발적 자상, 낙상, 절단, 평생 가는 부상, 심지어 사망을 야기하기도 한다." (p103).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면, 만들어진 모든 것은 디자인으로 탄생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디자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이 사용하는 사람의 필요를 최대한 반영했는지를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사용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걸까? 사용하는 사람이 디자인을 결정하는 걸까?
당연히 사용하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 캐스린 H. 앤서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에서 사용자의 '디자인 결정권'이 심각히 침해당하는 사례를 패션, 제품, 건물의 측면에서 고찰한다. 저자는 '나쁜 디자인'을 비판하며, 사용하는 사람의 젠더, 연령, 체형 면의 다양한 '니즈(필요)'를 고려한 '디자인'의 '넛지'를 그 개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패션 디자인
크고 마른 체형이 보편으로 규정되면서, 체형이 크거나 작은 사람들은 옷 앞에서 의기소침해진다. 제대로 맞는 옷을 사 입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체형이 큰 사람들은 가장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도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옷의 길이는 어떤가. 바지의 길이는 비교적 쉽게 수선한다지만, 셔츠나 티셔츠, 블라우스 등의 소매를 줄이는 일은 쉽지 않고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한다.
옷은 또 어찌나 유행을 타는지, 스키니 스타일이 유행할 때 폭이 넓은 바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인의 옷은 어떤가? 노인의 옷은 정말 마땅한 것이 없다. 내 엄마는 단추 달린 오픈 스타일 니트를 좋아하는데, 매장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노인 옷들도 어찌나 유행에 충실한지, 고령의 노인의 몸에 맞는 편한 옷을 구해 선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옷의 디자인은 단지 젊고 크고 마른 체형에 유리하게만 고안되는 걸까?
제품 디자인
어린이 용품, 장난감, 포장, 대중교통 디자인까지, 우리는 위험천만한 디자인에 둘러싸여 있다. 트램펄린은 미소아과 협회에서 가장 위험한 놀이기구로 규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클램셸 포장'(두껍고 딱딱한 플라스틱 용기)을 뜯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견고한 포장을 뜯기 위해서는 칼로 절단해 해체해야 하는 정도의 고난도의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포장의 폭력'이 일어나는 이유는 쓰는 사람의 안전이나 편리보다는, 오직 제품의 보호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의 불편함은 어떨까? 오른손잡이를 전제한 연장, 학교 책상, 생산 라인 등은 '왼손잡이 증후군'을 일으켜 건강 침해는 물론, 기대수명을 줄이고 작업장에서는 산재율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잘못된 디자인이 단순히 불편 정도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사가 서게 되는 연단은 어떨까? 모두 키 큰 성인을 기준으로 디자인됐기 때문에,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는 연단에 서게 되면 보이지가 않는다. 열차나 버스, 비행기의 좌석은 어떤가? 단지 보통의 체형만 수용될 수 있다. 좁은 의자, 앞뒤 좌석 간 밭은 간격은 장시간 여행객의 편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의 다른 체형을 고려하지 않는 편향적 디자인은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연단은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디자인할 수 있으며, 오른손잡이 전용 디자인은 양손잡이가 쓸 수 있게 만들어질 수 있고, 대중교통 좌석은 팔걸이를 제거해 넒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고안될 수 있다.
건물 디자인
저자는 "공중화장실은 당대의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p179)이라 언급하며, 건물 디자인 중 나쁜 디자인의 전형적인 사례로 화장실에 주목한다.
여남 화장실의 비율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째서 기저귀 교환대는 여성 화장실에만 있는 것인지, 왜 세면대의 높이는 아동들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지, 어째서 공립학교 화장실을 비위생적이고 폭력의 장소로 방치되는지 물으면서, 그 대안도 함께 제시한다.
기저귀 교환대를 남성 화장실에도 설치하거나, '가족 화장실'을 배치하면 된다. 높게 디자인된 세면대는 아동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디딤대인 스태픈워시(STEP'N WASH)를 설치해 보완할 수 있으며, 공립학교 화장실은 '남녀공용화장실' 또는 '젠더중립화장실'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남녀공용화장실'이나 '젠더중립화장실'은 이미 미국 150곳 대학에 설치되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시선을 미국 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세계의 화장실 실태도 보고한다. 아프리카 소녀들은 학교에 화장실이 없어 등교를 할 수 없고, 인도의 3억 3천만 여성들 또한 화장실이 없는 채 살아가고 있다.
직업의 '젠더 편향'은 나쁜 디자인과 연동된다. 남자들이 독점하는 직업군인 건축가, 엔지니어, 과학자의 경우, 임금 격차, 지지기반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유시설의 부재와 화장실의 낮은 접근성 등으로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MIT 낸시 홉킨스 교수는 남성에 비해 훨씬 협소한 연구 공간, 연구비의 낮은 책정 등을 문제 삼으며, '젠더 편향성'을 제기한 바 있다.(p286) 이에 MIT는 문제 제기 후 6년 만에 개선책을 내놓았다.
저자는 여성의 정치 진출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당에 상하원 전용 화장실이 여전히 남성 전용임을 일깨운다. 또한 법원의 경우 어린이용 대기실, 직원 대상 보육 시설 등의 공간이 고려되지 않는 '권력만을 위한 공간'임을 지적한다. 법원의 젠더 편향성은 꾸준한 문제 제기와 법원젠더편향위원회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중이다.
여성 인력이 현저히 적은 소방서의 경우, 샤워실, 탈의실, 수면실 등 여성대원의 공간이 부재하다. 여성 대원에게도 시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