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많았지만, 내편은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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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3년 전 2박 3일간 가출했던 이야기다. 당시 나는 시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다. 남편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이 없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복직을 앞두고 두 아이의 양육이 두 번째 이유였다. 당시 남편은 다른 사업을 구상 중이라 수입이 한 푼도 없었다. 나는 출퇴근 시간 왕복 4시간의 거리를 오가며 삶을 버텨내고 있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므로….
아이들 양육은 시부모님이 도와주셨지만, 그것은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이었다. 내가 집에 오는 순간부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주말에는 시부모님과 아이들을 포함해 6명의 식사와 설거지, 집안일이 내 몫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뒤돌아서 한두 가지 집안일을 하다 보면 다음 끼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머님이 평일에 가사 일과 육아를 전담했으므로, 주말에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내가 왕복 4시간 거리의 회사를 오가는 것을 안쓰러워 하셨지만, 아들인 남편이 설거지하는 것은 마음 아파하셨다. 며느리의 힘듦은 머리로 이해해주는 것이었고, 아들의 힘듦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머리와 마음의 거리는 서울과 부산의 거리보다 멀었다.
외로웠다. 며느리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가족 구성원이었지만, 마음으로는 묶일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집안의 아이 돌봄과 가사노동은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대를 이어 어머님과 며느리에게 이어지는 노동. 처음엔 분노하다가 나중엔 지쳐갔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들어서면서 내가 착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여자가 생계를 책임지면 남자가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해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누가 생계를 책임지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만 생계를 책임지라는 법 있나?', '한 사람만 생계를 책임지라는 법 있나?' 싶었다. 능력이 되는 누군가가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가 생계를 책임질 때와 여자가 생계를 책임질 때 집안의 노동 강도는 달랐다. 사회는 여전히 엄마의 몫을 가장 많이 원했고, 남자는 여전히 그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육아와 집안 노동의 주 책임자는 여자였다. 더군다나 시부모님과 같이 산다면 남자들은 가사노동에서 '완벽하게' 해방이었다.
두 번째 착각은 시어머니도 여자니까 며느리를 이해해줄 거라는 거였다. 물론 이해는 해주었다. 하지만 그 이해 뒤에는 이런 말이 따라왔다. "힘들지? 그런데 어쩌겠니. 엄마니까, 여자니까." 어머님 세대에서 여자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당연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만 육아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것에 분노했지만, 어머님은 분노하지 않았다. 나와 어머님의 생각 차이는 컸다.
어머님과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그 갈등은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부부 싸움으로 이어졌다. 분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분가 계획에 시부모님은 반대였고, 남편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유는 돈이었다. 돈이 부족했다. 돈이 부족해서 시부모님께 얹혀사는 처지였으니까.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누웠는데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새벽 3시에 나는 집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엄마, 아내, 며느리 이전에 나라는 여자
한참을 달려 바닷가에 도착했다. 해변에 차를 대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날이 밝고 숙소를 찾았다. 딱히 생각나는 곳은 없었다.
예전에 가족들끼리 놀러 와서 장기숙박을 하던 민박집이 생각났다. 그 민박집 아주머니의 푸근한 인심이 그리웠다. 그 민박집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정에 굶주렸던 것 같다. 아주머니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물었다.
"혼자 왔어요?"
"네……"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에 불을 넣어주고, 이불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라면과 김치, 버너와 냄비를 가지고 왔다.
"아침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뭐라도 좀 먹으라고..."
그 말에 울컥,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아주머니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치로 아는 것 같았다. 왜 내가 혼자 왔는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푹 쉬라며 나가셨다. 그렇게 라면과 김치를 받아 들고, 민박집 방 한 켠에 앉아 한참 동안을 울었다.
결혼 이후 밀렸던 설움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라면으로 늦은 끼니를 때우고 바닷가 산책을 나섰다. 생각을 정리했다. 나라는 여자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왜 참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자유를 욕망하던 사람이었다. 혼자 여행하기를 즐겼던 사람이었다. 직장인이 되면서 타협할 것이 많아졌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나니 참고 견뎌야 할 것이 많아졌다. 엄마가 되고 나니 희생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 내가 욕망하던 자유는 내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다들 참고 사는데, 나만 이상한 건가? 내 삶은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온갖 생각들이 올라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2박 3일간 치열하게 고민했다.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남들처럼 입으려 했다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결혼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 우리가 잘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