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봉정암 오층 석탑높이 3.3m.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석탑으로 보물 제1832호로 지정되었다.
이종헌
봉정사오층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안치한 탑이라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흡사 거대한 바위를 뚫고 나온 듯 기단부와 바위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복원의 <설악왕환일기(雪嶽往還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탑 앞 큰 바위에 굴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이르렀으며, 굴은 배를 매어두던 곳으로 일찍이 어떤 사람이 탑대 주변에서 조개껍질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곧 증거라 한다. 생각해보니 이 굴에 배를 맬 때쯤이면 온 나라가 다 물에 잠겨 살아남은 자가 없었을 터인데 누가 그것을 보고 전할 수 있었단 말인가?"
바닷물이 탑대 아래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혹, 설악이 온통 구름바다에 잠긴 것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배는 곧 신선의 뗏목이다. 만학천봉(萬壑千峰)이 구름바다에 잠긴 때, 한 조각 신선의 배를 타고 구만리장공을 노 저어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장쾌하다. 문득 발아래 굽어보이는 공룡능선 어느 봉우리에선가 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숙소로 돌아와 봉정암과 관련된 글들을 이것저것 살펴보니 문득 홍태유(洪泰猷, 1672~1715)의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온다.
躋攀眼欲暗 부여잡고 오르자 어두워지는데
峯際一菴明 봉우리 옆에 암자 하나 빛나네
火知僧去暫 화롯불 있으니 스님은 잠시 비웠고
香到佛前淸 향 피운 불전에 다가가니 정신 맑아지네
地界乾坤別 지상세계의 별천지나
登臨嶽岫平 올라오니 묏부리들 평평하게 보이는데
中宵巖壑動 한밤중에 바위와 계곡 울리니
風激海濤聲 바람이 부딪쳐 파도소리 내는구나
-<봉정암> 제3수 중 2수, 권혁진 옮김-
안타깝게도 지금은 예전의 바람소리를 듣기 어렵다. 절의 규모가 과거에 비해 많이 커졌고 건물들도 모두 새로 지어 방풍, 방음이 잘 돼 있는 탓에 일부러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옛날 선인들이 느꼈을 감흥은 맛볼 수 없다.
얼마 전, 1960년대 봉정암의 모습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비록 널빤지로 지붕을 인 초라한 건물이었으나 왠지 지금의 봉정암보다 훨씬 더 봉정암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장엄한 구름바다가 발아래 펼쳐지고, 밤에 문을 닫고 누우면 산의 정령들이 벌이는 바람의 향연에 잠 못 이루었을, 문득 그 시절의 봉정암이 그리워진다.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인 후 깨어보니 어느덧 새벽 4시, 카메라를 챙겨들고 탑대에 오르자 시커먼 먹구름을 헤치고 보름달이 선연한 자취를 드러낸다.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잠든 시각, 텅 빈 탑대에서 달과 나와 탑이 삼자대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 가득 밀려온다.
저 달이 진리의 상징이라면 탑은 깨달음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탑대를 서성이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카메라를 꺼내 달을 향해 셔터를 누르려 하자 달은 이내 검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달은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는 것임을 깨달으며 탑대를 내려서니,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그제야 달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