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공원에 남아 있는 서울대학교 유적기념비서울대학교 동숭동 옛 캠퍼스를 1/100로 줄여서 만든 기념비다. 주택공사가 1천6백만 원을 들여 만들었고 1976년 12월 16일 제막식을 통해 공개했다.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옛터에 조성한 공원 이름이 마로니에인 이유는 마로니에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는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본인 교수가 심었다는 설과 경성제대 불문학 강사였던 프랑스 신부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는 설이 있다.
백창민
설립 취지가 이렇다 보니 학문 공동체가 아닌 '친일 인재 양성소'로 기능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해방 후 경성제국대학 부지와 시설, 학생, 인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립 서울대학교가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는 식민지 통치에 복무하고 친일 인재 양성소로 기능한 과거를 자기 비판과 혁신을 통해 단절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게 된다.
일제는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봉쇄할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 안에 정치, 경제 분야 학부는 아예 설치하지 않았다. 식민통치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할 목적으로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했다. 교육 공급자 편의대로 문과와 이과로 나눠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이때 이식됐다. 이공학부도 1941년 1월 1일 신설했는데, 조선의 공업기술 발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확대에 대비해 군수공업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교수와 학생 구성에서도 조선인은 차별을 받았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당시 전체 교수 57명 중 5명만 조선인이고, 학생 역시 조선인은 168명 중 44명에 불과했다. 직원 수도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입학생이 적다 보니 졸업생도 많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810명뿐이었다.
일제는 조선과 타이완 두 곳의 식민지에 제국대학을 세웠는데, 사실상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패전 후 경성제국대학과 타이페이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에 다니던 일본 학생은 본토 제국대학으로의 전·입학을 인정받았고 교직원의 대다수도 일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성제국대학은 타이완에 세운 타이페이제국대학을 제외하고 일본 내 다른 제국대학에 비해 학생 수가 적었다. 타이페이제국대학의 경우 학생 수는 경성제국대학보다 적었지만 다섯 개 학부를 갖추고 더 많은 예산을 사용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지어진 자리에 대해 '야사'가 전해 온다. 무학대사는 한양을 조선의 새 도읍으로 추천하면서 인왕산을 등지고 동향으로 궁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 더불어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남향으로 궁을 지을 때 벌어질 여러 가지 일을 예언했다. 그중 하나가 낙산 아래에서 인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경성제국대학에 이어 서울대학교가 이곳에 자리할 것을 알았던 걸까.
또 하나,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데려온 지관(地官)이 조선총독부 자리로 추천했던 자리가 이곳이라고 한다. 1911년 일본 건축가들이 조선총독부 자리로 제안한 곳도 동숭동 경성제국대학 자리와 경성부청, 즉 지금의 서울도서관 자리다. 훗날 일제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지관과 일본 건축가가 추천한 동숭동에는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조선의 머리를 휘어잡자'는 취지였다고 하는데, 경성제대가 해방 후 국립 서울대학교로 이어질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걸까.
실제로 경성제국대학 부지로 영등포, 노량진, 청량리 같은 여러 곳이 후보에 올랐지만 경기도립상업학교와 총독부의원이 있던 동숭동 땅 9만 평이 최종 낙점됐다. 경성제국대학의 총 공사비 예산은 1기와 2기를 합쳐 310만원. 1923년 민영휘가 기부한 1만 원으로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2층 건물을 신축했음을 생각할 때 경성제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학교 교사 설계는 조선총독부 토목국 건축과 이와츠키(岩槻) 기사가 맡아, 콘크리트 골조에 벽돌을 쌓은 후 황갈색 타일을 발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