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
나눔의집
일본인 작가 호리코시 히데미도 어린 딸이 핑크색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해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엄마가 블랙 마니아여도, 칙칙한 색 옷만 입어도 여자아이들은 유아기 때 대체로 핑크색에 빠져든다는 점을 저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딸 둘을 둔 아빠인 제게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의문이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이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이 핑크(혹은 프린세스, 반짝반짝거리는 것, 요정 등)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도록 타고나는 것일까? 설령 이것이 타고난 성질이라 할지라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핑크색에 왜 이런 찜찜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핑크색에서 또 다른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12쪽)
아이가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지 않기를
부모로서 아이들이 가능하면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한가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른 성역할에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틀에 갇혀 살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딸이 미용, 소꿉놀이, 요리 등 기존의 여성 역할을 답습한 장난감들에 영향을 받아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민과 의문을 이 책에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핑크가 어쩌다가 여자의 색이 되었는지 역사를 살피고, 기존 여아용 장난감과는 다른 접근을 하면서 핑크에 저항하는 운동을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진출, 특히 이공계 분야로의 진출 문제까지 핑크와 연관지어 이야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선 핑크색과 여자아이의 관계를 넘어 핑크와 남자아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 부분을 통해 저도 '남자다움'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나뉜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생각보다 크게 제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같은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핑크는 여성의 색? 역사는 짧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시대엔 여성 중심 문화가 활기를 띠었는데 이 때 귀부인들은 핑크색 옷가지, 가구, 식기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장미를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퐁파두르 핑크'라는 사기그릇 색에 이름이 사용된 퐁파두르 후작부인 등이 유명한 인물들입니다. 기원은 기껏해야 200여 년 정도이고 이런 경향이 심화된 것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고 하니 '핑크=여성의 색'이란 편견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여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보석, 스타킹, 하이힐, 리본과 레이스 등을 19세기 이전 서양에선 남성들이 권력 과시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과 민족학이 계기가 되어 화려한 장식은 열등한/미개한 혹은 하류계층 남성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남성이 예쁜색이나 장식을 좋아하는 것을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