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타델라 요새에서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바라보는 여행자들.
최늘샘
헝가리는 헝그리해요, 배가 고파요
아프리카 서쪽 모로코에서 동쪽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가 비싸서, 계획에 없던 동유럽을 경유하게 됐다. 동유럽에 와서야,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유럽'에 대한 생각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현대 문명의 모델이 된 유럽' 혹은 '온세계의 식민지배국이었던 부유한 유럽 세계' 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서유럽 주류 강대국들의 일면일 뿐이었다. 서유럽과 동유럽은 어떻게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궁금해졌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구분은 국경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동쪽에 가깝지만 서유럽처럼 느껴지고 슬로베니아는 서쪽에 가깝지만 동유럽처럼 느껴진다. 주로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지역을 지금까지도 동유럽이라고 부른다. 지리적 경계와 사회적 경계에는 차이가 있고,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지역도 많다. 러시아와 터키는 유럽일까 아시아일까. 아라비아, 중동이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여행은 고국의 일상에서 생각지 않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다양한 세계를 고민하게 한다.
이왕 발을 디뎠으니,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발칸반도의 나라들을 거쳐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터키를 여행한 뒤, 이집트부터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이어나가자고 마음먹었다.
첫 기항지는 동유럽 중간에 위치한 헝가리. 저가 항공 답게 비행기는 늦은 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벤치나 바닥에 누워 잠든 사람들과 함께 익숙한 공항 노숙을 했다. 은행 운영 시간에는 수수료가 조금이나마 덜 나올까 싶어서 아침 아홉시까지 기다렸다가 현금을 인출했다.
시간별 차이는 전혀 없는 건지, 고작 12만 원을 뽑았는데 수수료와 환율 차액이 2만8000원, 수수료로 악명 높은 아르헨티나 보다 더했다. 가만히 앉아서 돈 놓고 돈 먹는 건 은행 밖에 없는 듯, 답답해도 눈 뜨고 코 베여야 하는 금융자본의 세상임을 실감했다.
헝가리의 슈퍼마켓 상품이나 버스 광고에서 독일 국기가 붙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남한 사회에서 '일제'가 튼튼하고 좋은 것으로 여겨졌듯이, 동유럽 나라들에서는 이웃한 부자 나라 독일 제품이 좋은 것으로 생각되고 발전의 모델이 되는 모양이다. '서쪽이 되고 싶은 동쪽'이라는, 비교와 차이, 선망과 열등감을 담은 표현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씁쓸했다.
탈아입구,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해 구라파가 되기를, 남한은 일본 같은 경제 성장을 꿈꿨다. 동쪽이 꿈꾸는 서쪽 강대국들은 더 무엇이 되기를 꿈꿀까. 제2세계, 제3세계의 열등감 보다 무서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부를 유지하기를, 더욱더 강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본과 힘의 끝없는 욕망일 것이다.
다시 씁쓸하게도, 동유럽은 서유럽 보다 물가가 저렴해서 배낭여행자가 머물기에는 부담이 적었다. 하루에 5유로, 10인실 방이 십여 개, 그래서 아침 식사 시간이면 백여 명이 북적거리지만 무척 깨끗하고 편안하게 관리되는 대형 호스텔에서 열이틀을 쉬며 그동안의 여행기를 정리했다.
부다페스트 중심에는 대관람차 '런던 아이 London eye'를 본따 만든 '부다페스트 아이'가 있다. 매일 오전과 오후에 '프리 워킹 투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부다페스트 워킹 투어 주제는 주요 유적지, 유대인 역사, 공산주의 역사, 거리 예술 등으로 나뉘는데 나는 유대인 역사와 공산주의 역사 투어에 참가했다. 유대인 역사 투어를 선택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아서,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역사에 대한 경각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