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사로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랑과 화해를 전하는 평화의 사제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은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변혁운동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넘어 조국통일운동의 질적 고양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4.19혁명 이후에 조국통일운동이 활성화 되었던 역사에 이어, 6월민주항쟁 이후에도 다시 조국통일운동은 활성화되고 있던 때입니다. 1988년 전대협의 청년학생회담의 추진이 조국통일운동의 현상적 기폭제였다면, 목사님의 방북은 질적인 측면에서 조국통일의 방도와 목적성을 분명하게 격상시킨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조국통일운동에 확고한 신념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에도 나타나듯이 조국통일운동 역시 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뜨거운 심장으로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임수경의 방북과 더불어 군사독재 하에서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하셨습니다.
셋째, 평화통일운동의 장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셨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발표한 9개 항의 공동선언은 소영웅주의나 급진적 편향을 넘어서는 민족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공동으로 발표한 6.15 선언의 모태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단계적 연방제로 통일방안의 접점을 찾은 것은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과 고려연방제 간의 간극을 좁히는 중대한 좌표가 되었습니다.
넷째, 통일운동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민과 관이 모두가 함께하는 운동임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자신을 투옥한 공안정권, 민주화운동의 극복대상인 노태우정권에게조차 자신의 방북성과를 끊임없이 설명했습니다. 절대로 우리 민족에게 찾아온 실낱같은 평화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수사 기간 내내 남과 북의 정권 사이에서 대화를 중재하고 설득한 일은' 레토릭'이 아닌 진정성 있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통일"
마지막으로 반드시 통일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한반도 평화의 시대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중대한 시사점을 안배해 놓으신 듯합니다.
30년 전에는 UN 동시 가입과 교차 승인의 대두로 '두 개의 한국', 즉 분단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깊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전쟁으로 이어진 분단 이후 국제적으로 분단이 완성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절박함이, 그래서 분단고착화를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목사님의 절박함이 평양행을 결행케 했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습니다.
요즘 성급한 얘기겠지만 북미협상이 잘 타결되면 한반도 평화체제 그 이후의 대안으로 '두 국가 두 체제'의 시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목사님이 살아계시면 한반도 평화가 다시 분단의 장기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다시 통일의 길을 역설하실 것 같습니다. 비록 두 개의 나라가 장기화 되어도 하나의 시장을 통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라고 웅변하실 것 같습니다. '평화'가 우리 민족에게 복이 되는 참된 길이라고 믿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 30주년을 되돌아보며 높이 평가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