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을 앞둔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법 유지'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희훈
- 심쌤, 아이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낙태죄'가 폐지된다고 했을 때 아이 입에서 내 몸보다 '태아의 생명이 더 중요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와서 좀 놀랐어요. 당황했고요.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요. 사람은 어른이든 아이든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해 '측은지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이 우리 어른들보다 더 따뜻한 게 아닌지... 이런 마음은 지금처럼 생산성과 경쟁이 중요한 세상에선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거 같아요! 또 사람에 따라 타고나는 감정일 수도 있지만 의지적으로 길러줘야 할 능력이기도 하죠.
그런데 어떤 감정은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와 교육에 의해 그냥 따라가게 되는 감정들도 있는 거 같아요.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 진짜 내가 느끼는 감정인지 아닌지 거기에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와 관계 없이요.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느껴야 할 거 같은 이런 감정을 '제도적 감정'이라고 하는데요. '낙태'에 대한 우리의 감정도 바로 이런 '제도적 감정'이 아닐까 해요.
사회가 '태아=내 몸보다 소중한 생명', '낙태=내 몸보다 소중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낙태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감정을 갖기 어려울 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낙태를 누가 하는지, 왜 하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고 다른 시각, 다른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내 몸'이 모두의 몸이 아니라, 임신 당사자인 '여성'의 몸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애초에 '낙태'라는 말을 '임신중단'이라는 말로 들었다면? 아마 그랬다면 우리도 아이들도 낙태에 대한 생각과 반응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글에서 편견이 강한 '낙태'라는 말 대신 '임신중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할까 합니다."
- 임신중단이란 말에 그런 의미도 있네요. 심쌤 아이들은 어떤 반응이었어요? 큰애가 3학년이라고 했죠?
"놀라운 이야길 들었죠."
- 기대되네요. 어떤 말이었을지.
"4월 11일 아침, 저도 모르게 '으~~~떨려!'라고 했더니 등교 준비를 하던 큰아이가 '뭐가 떨려?'라고 묻더라구요. '낙태죄 폐지가 결정되는 날'이라고 했더니 오히려 나도 낙태가 뭔지 안다고 그러는 거예요."
- 뭐라고 하던가요?
"'뱃 속의 아기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 헉! 정말 놀라셨겠어요.
"제가 MSG 넣은 말이 아니고 정확히 저 워딩이었어요. 그래서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고 물었더니, 책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 책에서요?
"으레 그렇듯 낙태에 대해 일방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한 책을 본 거 같았어요."
- 이런 이야길 들으면 특히 성에 관한 책은 더 나은 관점을 가진 책으로, 가려 읽게 할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사회 전반에 흐르는 낙태에 대한 생각이 그래 왔으니 아이들이 접하는 자료들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봐요. 중교등학교 시절 보건교육 시간이면 꼭 낙태 비디오를 보여줬는데 기억하세요? 뱃속 아이를 조각조각 내는 아주 자극적인 영상이었잖아요. 그런 자료들로만 낙태를 접했던 어른들, 그리고 영향을 받은 지금의 아이들 역시 낙태는 '태아를 죽이는 끔찍한 것'이라고 느끼기 쉽지요."
-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임신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특히 남학생 반응에 놀라셨다고요.
"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워크숍이었는데, 준비된 종이에 익명으로 '임신과 낙태'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나 질문을 자유롭게 적어서 함께 이야기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익명이라 그런지 솔직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죠. '임신도 무섭지만 낙태는 더 무서워요', '무조건 임신 안 하는 방법 없나요?', '낙태는 살인 아닌가요?', '안전한 낙태 방법 가르쳐 주세요', '피임에 대해 가르쳐 주지도 않음', '임신 낙태보다 우리 엄마가 더 무서워요. 걸리면 죽음ㅋ' 등등요. 그런데 그 중 한 종이에 적혀 있는 말이 아주 인상적이더라고요."
-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여자들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없음, 우린 그저 즐길 뿐'이라고 써 있었어요."
- 아... 동공지진이 일어나네요.
"솔직히 저도 저 문장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 나이 또래 아이들 특유의 허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어떤 면에서 우리가 가진 인식을 꽤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쪽지에 적힌 '우리'(아마도 '남성'이겠죠?)는 임신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결과와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고, 자신들은 '섹스'만 똑 떼어 즐기겠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어딘가 좀 익숙한 말 아닌가요?
'낙태죄'에도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없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임신중단'이 법으로 금지되었을 때 일부 남성들은 '법'에 기대어 여성의 아픔과 위험을 모른 척하고, 몰래 '임신중단'을 선택한 여성들에게는 또 '법'을 이용해 비난해 왔지요.
하지만 '임신중단'이 가능해진 이제 더 이상 여성에게만 임신의 책임을 미룰 수 없어요. 좋은 것도, 힘든 일도 함께 누리고 도우며 나아가야 해요. '임신중단'의 가장 큰 의미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건강한 '재생산권' 보장이지만, 동시에 권리를 얻은 만큼 '임신중단'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의무도 함께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에요.
'임신중단'이 가능하다고 쉽게 임신중단 수술을 결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몸과 마음 모두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 통계를 봐도 '임신중단'이 합법화된 나라들의 임신중단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하지만 공동책임자인 남성들은 여성의 몸과 마음에 관심이 없거나 외면해 왔지요. 혹은 통제와 간섭을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여성들을 억압했고요.
이제는 변해야 해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피임하고 여성의 몸과 마음을 존중하고 생명에 대해 남여가 함께 고민해야 해요. 즉, 함께 예방하고 함께 안전하고 건강한 '임신중단'을 고민하고, 함께 출산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해요. 국가와 사회의 적극적인 도움은 필수고요. 그러니까 이제라도 '관심없음'이 아니라 '관심있음'으로 바뀌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