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
고양신문
가장 유쾌한 대목은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유치원 꼬마에게 작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장면이다. 꼬마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내가 넘어져서 우는데,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라고 말한다.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나니 나는 호수공원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대목에선 작가의 '일부심(일산 주민의 자부심을 일컫는 젊은이들의 신조어)'이 반짝반짝 묻어나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그런가 하면 동네에 새로 생긴 소아과 병원에서 엄마와 뽀뽀를 주고받는 꼬마, 동네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 라이더, 정발산 공원 새벽안개 속에서 공을 차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웃들의 다양한 삶의 결을 골고루 성찰한다.
마을에 대한 애착은 미각에까지 이어진다. 남북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평양냉면을 함께 먹은 장면은 백석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수수하고 슴슴한' 국수 묘사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백석이 먹은 냉면의 맛은 내가 일산 신도시의 식당에서 사 먹는 냉면의 맛과 그 기본과 지향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한다.
길에 대한 명상도 담겼다. 그는 고양의 주요 교통로인 의주대로와 경의선철로를 천여 년 역사 속에서 전개된 침략과 항쟁, 굴종과 저항의 축선이라고 정의한다.
김훈 작가에 의해 고양의 독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의 평범한 풍경과 일상이 역사의 순간과 연결되고 존재의 깊이와도 이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선물 받는다.
호수공원에서 만난 김훈 작가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고향은 물리적 출생지로서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일산은 외지인들이 들어와 만든 인공의 도시잖아요. 그러다보니 이곳을 내 고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적은 것 같아요. 이제는 마음을 기댈 공동체의식과 문화를 만들어가야지요."
그는 공간에 '이야기'가 깃들 때 비로소 정주의식이 생기고, 고향이라는 자의식도 생긴다고 말했다.
"공양왕릉이나 최영 장군 묘처럼 깊고도 오랜 이야기를 품은 공간이 초라하게 방치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아울러 괜찮은 식당이나 상점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전에 자주 바뀌는 것도 안타깝구요."
지역신문기자의 편파적 시선으로 책 속에서 고양과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해 강조했지만, 사실 이번 산문집에서 김훈 작가가 다룬 이야기의 폭은 방대하다. 시간적으로는 선사시대 구석기인들의 주먹도끼부터 지난 연말의 송년회 자리까지를 아우르고, 주제 면에서도 세월호 침몰과 촛불광장, 분단의 상처와 평화의 열망까지 당대의 첨예한 고민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향기를 더하는 좋은 술처럼, 그의 산문은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독자들에게 전하며 익어가고 있다.
유경종 기자 duney789@naver.com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바른지역언론연대는 전국 34개 시군구 지역에서 발행되는 풀뿌리 언론 연대모임입니다. 바른 언론을 통한 지방자치, 분권 강화, 지역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활동합니다. 소속사 보기 http://www.bjynews.com/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