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 107주년을 하루 앞두고 14일 평양에서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 조선중앙TV가 이날 방영한 보고대회 모습.
연합뉴스=조선중앙TV
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로, 북한은 그의 사망 3년 뒤인 1997년부터 4월 15일을 '태양절'로 명명하고 매해 기념하고 있다. '정권의 입'이라고 할 수 있는 <로동신문>에선 가끔 '김일성 조선'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김일성=조선, 김일성이 곧 국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북한 연구 권위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김일성이 곧 북한이라는 나라의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했다. 사실상 김일성을 비롯해 그의 자녀들은 3대째 조선시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려오고 있다.
김일성 도왔다는 '중국인 지주'
김일성 우상화를 통해 그의 만주 항일 유격전은 북한의 신화로 자리잡았다. 신화엔 거짓과 과장이 섞여들어가곤 한다. 그러다 김일성의 말년에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간행되면서 신화를 사실에 맞추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세기와 더불어>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백현 19도구에는 조덕일이라는 중국인 대지주가 있었다. 삼촌이 죽으면서 물려준 유산을 받아가지고 30대에 일약 대부호가 된 사람이었는데 토지를 80여 정보나 가지고 있었다. (중략) 1937년 설준비를 하게 하였다. 인민혁명군의 명의로 된 통고장을 썼다.
통고장이 요구하는 대로 인민혁명군을 도와주자니 일본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그 요구를 묵살해 버리자니 혁명군의 징계가 두려웠다. (중략) 나는 지체없이 20여 명의 대원들을 19도구에 내려보냈다. 그때 그들은 수십대의 발구에 600여 말의 쌀과 여러 마리의 돼지 그리고 많은 사탕가루를 싣고 밀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조덕일은 그 후에도 우리에게 여러 번 상당한 양의 원군물자를 보내주었다."
김일성 자신이 화자가 된 이 회고록에서 그는 빨치산 활동 시절, 식량을 조력받았던 조덕일이라는 중국인 지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조덕일은 그뒤 김일성 부대에게 식량을 제공했던 것이 발각돼 일경에게 끌려가 고춧가루 고문을 당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세기와 더불어>에선 여기까지만 소개하고 있고, 해방 이후 조덕일과의 인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지주로 잘살았던 조덕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주 청산'이 시작되면서 장백현 맞은편 북한 도시인 혜산으로 도망쳐 왔다. 김일성은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지주는 북한에서도 심한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김일성은 조덕일을 처형하거나 중국으로 송환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어려웠던 시절, 일제의 체포 대상이었던 자신을 목숨 걸고 도왔던 조덕일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김일성은 그를 자신의 생일잔치에 가끔 불렀다고 한다. 조덕일에겐 특별배급도 해줬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롤렉스 시계도 선물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를 직접 만난 이들은 '접견자'로 불리며, 자개판에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하사(?)받는 등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사실 북한에서 '화교'는 2년에 한 번씩 영주권을 갱신하는 외국인으로, 차별받는 존재로 살아간다. 하지만 조덕일의 자손들은 대학 입학도 허락받았다. 김일성의 압력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몇 번 식량을 제공한 것치곤 분에 넘치는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조덕일을 두고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중국인이라고 칭찬까지 했다.
이는 기자가 혜산 출신 탈북민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 탈북민은 조덕일처럼 북한 화교 출신으로,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중국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전했다. 이 중국인은 북한 거주 당시에도 조덕일 일가와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마침 조덕일의 손자 중 한 사람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오면서 이같은 이야기가 남한에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조덕일의 손자는 남한에 잘 정착해 어려운 처지의 탈북민을 도우며 살고 있다.
"김일성 피신시킨 중국 뱃사공의 손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