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고 오랜 전통을 가진 화정감리교회였지만 세월호 사건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박인환 목사. 그러나 지금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권이민수
- 목사님이 활동하는데 있어서 화정교회는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그리고 교회 내 유가족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이곳의 교회 토박이들은 오랫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보수적 정치의 색이 짙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가 터진 수요일 날 팽목항에 못 내려갔습니다. 그날이 수요예배였거든요. '목사는 나뿐인데 어떻게 하나? 교인들이 왜 교회 안 지키나?' 할까 싶어 태평스레 생각한 거죠.
그에 반해 그때 다른 목사들은 팽목항에 내려가서 같이 울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나는 못 하고 다음날 잠깐 내려갔다 왔습니다. 여기 세월호 피해 학생들이 있는 교회가 37개 교회이고 피해 학생은 76명입니다. 그중 두 교회는 (목사 자녀가 희생자인) 당사자니까 나머지 35개 교회가 피해 학생이 있는 교회죠. 그런데 지금까지 세월호 관련 행사에 와서 함께 하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초기에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속이 상합니다.
본회퍼가 히틀러를 시장 바닥에서 큰 트럭을 몰고 다니는 미치광이에 비유했었죠. '미치광이가 정신없이 차를 몰고 사람들을 치어 죽이면, 목사는 뒤따라가면서 죽은 사람들 장례를 치르는 것이 목사 일인가, 아니면 미치광이에게 뛰어들어서 운전대에서 끌어 내리는 것이 목사 일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는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었잖아요.
이 이야기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같이 울어주고 장례를 치르고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특히 희생자가 있는 교회 목사들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희생자가 없는 다른 지역, 다른 교회 목사들이 와서 세월호와 함께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다. 나는 희생 학생 있는 교회 목사지만, 당신들은 아님에도 여기 와서 헌신하는 것을 보면 존경스럽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도 주류가 보수적이었습니다. 보수 매체를 더 신뢰하고 있었구요. 그렇지만 제가 오래 이 교회에 있었고 그동안 신뢰 관계를 잘 쌓아왔었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 때 '세월호 이야기를 강단에서 그만했으면 좋겠다, 세월호는 예수와 관계가 없지 않으냐'하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막 화를 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수 믿는 거 맞습니까? 세월호와 예수가 관계가 없다니요? 우리가 모두 형제자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제가 그렇게 설교했습니까? 여러분 듣기 싫어하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오셔서 우리 교회가 세월호와 함께 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오히려 제 결정을 지지하신다고 고백하시면서 상황이 전화위복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반대 이야기 나오지 않고 세월호에 협조적으로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그냥 교회 눈치를 봤으면 유가족은 쫓겨났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 줄까봐 세월호 이야기를 못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월호로 인해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늘어났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세월호 연극단이나 합창단도 초청하고 후원도 잘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태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세월호 가족들이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교회가 세월호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니까요. 제가 이를 두고 항상 비유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화목난로를 땝니다. 그래서 뒷산에서 죽은 나무를 교인들이 가지고 오면 제가 쪼개곤 하지요. 소나무는 잘 안 쪼개져요. 아카시아는 잘 쪼개지죠. 그런데 하루는 성도님이 그러시길 더 잘 쪼개지는 나무가 있다는 거예요. 참죽나무인데 그 나무는 도끼를 들기만 해도 그냥 알아서 쫙 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대부분 세월호에 대해 말 못 하는 목사들이 이 참죽나무와 같습니다. 교회, 교인 눈치 보면서 알아서 기고 쪼개져 버리는 거죠. 과거에 비해 한국 교인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생각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나갈 수밖에 없어요. 세월호 침몰은 한국교회의 침몰이기도 했던 겁니다. 아마 회복은 힘들지 않을까요? 이제라도 회개하고 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배지에 시비나 걸고…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것이라 생각
- 목사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과 5년간 함께 하셨는데 그동안 무슨 일을 해오셨나요?
"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그저 황망하기만 해서요. 그러다 유가족들이 국회 농성할 때 장로님들과 찾아가기도 하고, 청와대 농성할 때 포도도 싸 들고 가서 위문도 하고, 광화문에서 피케팅도 했었죠. 예은이 아빠에게 뭘 도울까 물었더니 세월호 특조위 1기를 설치해 달라는 서명을 받아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1만 8백 명 정도 열심히 욕먹고 싸워가면서 서명을 받은 적이 있고 세월호 배지도 열심히 보급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저 황망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은 엄마 박은희 전도사에게 내가 세월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으니 '교회에서 쫓겨났거나 교회를 떠나온 가족들이 주일에 분향소 유가족 대기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주일 오후 5시쯤 예배를 인도해주세요'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1월 31일에 감리교 고난함께(사무총장 진광수 목사)와 함께 첫 예배를 드렸어요. 그 후에 안산의 교회들, 서울이나 인천의 신청하는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유가족과 예배도 드리고 이야기도 듣고 했습니다. 이 예배는 분향소 철거하는 주간까지 계속되었어요.
그러다 세월호 가족 중에 아빠들이 있어서 뭐 좀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목요기도회에 오셨던 안홍택 목사가 목수여서 그에게 목공 일을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감리교에서 지원받고 안 목사님이 가르쳐주겠다 하셔서 목공소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이진형 목사가 와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DIY도 가르쳐 주었어요.
함께 목공 일을 배우는 가족들과 작년 미국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도 견학했습니다. 목공 일로 삶을 유지하는 제세레파 공동체입니다. 10박 11일 동안의 여정이었어요. 브루더호프 공동체 사람들의 환대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여기가 천국인 거 같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그전까지는 힘이 없었는데 그 후에 힘을 얻어 안산시의 도움으로 416목공협동조합을 작년 10월에 만들 수 있었습니다. 5월 25일에 개소식 예정입니다.
세월호 3주기 때는 '416기억독서대'를 만들었어요. 2017년 6월에 정부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를 깨부수는 것을 보고 '아, 이 정부가 세월호를 어서 잊게 만들려고 하는구나. 어떻게 저항할까?' 하다가 한사람이라도 416참사를 기억해야 진상규명을 하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그 시기가 목공방에 드나들 때여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수만큼 독서대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후 10개월간 기본적인 활동 외에 모든 시간을 다 투자했습니다. 나무를 하나하나 재단하고 조립하는 등 손길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또 304명이 모두 다른 사람인데 만약 나무를 사서 쓰면 모두 똑같은 독서대가 나오겠더라구요. 그래서 나무를 사서 쓰지 않고 다 주워서 만들었습니다.
그후 3주기에 광화문, 꿈의 교회, 안산분향소에서 전시했습니다. 독서대에 단원고 세월호 약전을 요약하거나 편지를 써서 하나씩 전시했구요. 제가 독서대를 다 가져갈 수 없으니 전시하면서 원하는 분들은 기부금을 내고 독서대를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그 재정은 세월호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독서대를 만들었던 10개월을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와 모두 함께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