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간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먹는 염소들. 아르간 오일로 유명한 아르간 나무는 아가디르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물이다.
최늘샘
"예전에 한국 선원이 많을 때는 여기 아가디르에만 한국인 2천 명이 살았다. 모로코 바다가 지중해랑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라서 세계적인 황금어장이고. 70, 80년대에 여기서 일했던 한국 선원들이 모로코 어업을 거의 다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지금은 고생스럽게 배를 타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선원은 아무도 없고 선장들만 몇 명 남아 있다."
1960년대, 70년대에 독일에서 일한 남한의 간호사와 광부들, 중동에서 일한 건설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적이 있는데, 모로코에서 원양어선을 탔던 남한 선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생소하고 놀라웠다.
"전에는 한국 선원들이 돈 벌려고 아프리카까지 왔는데, 이제 한국에서 동남아나 중국인 선원들을 쓰니까, 시대가 완전히 바뀐 거지. 여기는 이제 선장들도 몇 명 안 남았으니까 다 사라지기 전에 그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 잘 아는 선장한테 내 스마트폰을 하나 맡겨서 촬영을 좀 부탁하려고. 유튜브에 올려서 사라져가는 역사를 소개하고 싶다."
"저같이 시간 많고 카메라 다루는 사람이 한 번 배에 따라 타면 좋은데, 배는 워낙 멀미가 심해서 아무나 못 탄다 그러더라고요."
"그럼. 그건 못 하지. 보통 사람들은 원양어선 못 탄다. 배가 얼마나 흔들리는데. 바람이 좀 불면 커다란 배가 바다 밑으로 잠수하다시피 해서 간다."
저 광대한 바다에는 얼마나 수많은 뱃사람들의 노동과 고독, 오랜 세월이 깃들어 있을까. 달팽이관과 비위가 약해서 버스만 타도 멀미가 잦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선택과 포기의 연속, 여행자의 길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특별히 새로운 선택을 해야할 순간이 많지 않다. 세계 여행자의 시간은 머무름보다는 떠남과 낯섦이 잦아서 선택과 포기의 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여행을 떠나기 전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는 막연히 아프리카를 일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아프리카를 여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부 아프리카 여행을 말렸다. 전쟁 중이거나 치안이 불안정한 나라가 많고, 국경을 넘는 교통수단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멘탈리티(정신체계)가 달라서, 나이키 신발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들었다. '카더라'는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고, 그런 편견에 직접 부딪혀 보고 편견을 깨는 것도 내 여행의 목적이므로 보통은 크게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모로코에서부터 서부, 중부, 남부 아프리카를 돌아 동부까지 가려면 어림잡아 스무 개 이상의 나라를 지나야 하고, 나이지리아,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 등 특히 위험하다고 알려진 나라들을 지나야 한다. 비행기로 위험 국가를 건너 뛸 수도 있지만 아프리카에는 비행기 이용객이 적어서 저가 항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50여 개 나라 중에 무비자로 여행 가능한 국가는 모로코, 남아공, 보츠와나 뿐이다. 다른 모든 나라들은 적게는 25달러, 많게는 80달러의 비자 비용이 든다. 돈을 낸다고 모든 국경에서 바로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도 아니다. 인근 국가 대사관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비자가 나오는 나라들도 많다.
위험과 비용과 복잡함. 그 모든 핑계를 바탕으로 나는 서부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동부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동유럽 헝가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발칸반도의 나라들과 터키를 여행한 뒤, 이집트로부터 남쪽으로,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이어갈 계획이다.
나는 좀더 무식하고 더 몰라서 용감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친척 형은 수 년 전 선원들 몇 명과 함께 승용차를 운전해 남아공에서부터 모로코까지 서부 아프리카를 종단했다고하니, 그 모든 경고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일주는 어떻게든 가능한 모양이다. 포기와 선택에 뒤따르는 아쉬움을 여행기로나마 기억해둔다.
서부 보다는 동부 아프리카가 덜 위험하고 관광지도 많다고 들었지만, 동부 아프리카 종단도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 "서아프리카는 지난 삼십 년 간 지속적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동아프리카는 최근 테러와 영토 분쟁으로 서쪽 보다 다섯 배 쯤 더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강대국들이 입맛대로 국경을 그어놓은 뒤로 줄곧, 아프리카가 위험하지 않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여겨지던 때가 과연 있기나 했을까. 여행이 쉽지 않다는 인도와 남미에 갈 때 보다 동아프리카행을 앞둔 지금이 조금은 더 떨린다. 이곳 모로코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뎠지만 아직 미지의 아프리카 세계로 가야할 모험의 길은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