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쇠실마을에 있는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과 김광언의 집. 치하포 의거로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한 청년 김구(김창수)가 40여 일 동안 머물며 숨어 지낸 곳이다.
이돈삼
삼일절에 이어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김구 선생이 떠오르는 이유다. 백범 김구(1876-1949)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 우리 겨레의 큰 스승으로 통한다.
김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선봉에 섰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다. '아기 접주'라는 별명도 얻었다. 교육자로서 애국 계몽운동도 펼쳤다.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4년간 옥살이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문지기'를 자처했다. 경무국장을 맡았다. 이어 국무령, 주석으로 일하며 항일에 앞장섰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공동작전도 폈다.
해방이 되자 11월 조국에 돌아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하지만 자주 독립국가, 통일정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친일, 반민족·반통일 세력의 흉탄을 맞았다. 1949년 6월 26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