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의 모습.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약산 김원봉은 무장투쟁 선봉, 훈장 주지 못할지언정..."
- 해방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친일파 청산 문제'가 아직도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입장에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작 청산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때를 놓친 바람에 아직도 일부 야당 의원조차도 '반민특위는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사실은 반민특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국론이 분열된 게 아닙니까?
저는 지금에 와서 물리적인 친일 청산은 불가능할지언정,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말처럼, 계속 이를 교육하고 계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또 다시 우리나라가 외침을 당해도 국민들이 외세에 영합치 않고 분연히 일어나 항거할 겁니다."
이종찬 위원장은 그 예시로 백범 시해사건과 약산 김원봉 임시정부 군무부장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백범을 시해했습니까? 일제 잔재 세력들이 백범에게 총구를 겨눈 것 아닙니까? 약산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무장 투쟁의 선봉장이었습니다.
그런 그분에게 해방된 조국은 훈장은 주지 못할지언정, 수도 경찰청장 장택상은 일제 고등계경찰 출신 노덕술을 시켜 수갑채워 연행했습니다. 약산은 아직 독립이 되지 않은 일제의 연장이라고 여겨 홧김에 월북한 겁니다. 북에 가서도 이용만 당했지요. 결국 그분의 혼은 아마도 여태 구천을 헤맬 것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 기념관에 담으려고 합니다."
기자는 서울에서 40여 년을, 대부분 종로구 구기동에서 살았다. 그래서 신교동 우당기념관은 출퇴근길로 매우 익은 동네요, 이종찬 관장은 종로에서 4선을 한 국회의원이기에 매우 낯익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분도, 나도 현직에 있을 때는 일면식이 없다가 기자가 항일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을 알게 된 뒤부터 인연이 닿았다.
그리하여 우당기념관을 방문하자 사진자료를 잘 구비하고 있었다. 마침 안내를 하던 이 관장에게 직언했다.
"가보로만 간직하지 마시고 국보로 만드십시오."
"네에?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사진집을 내십시오."
결국 이 대화는 실현됐다. 우당기념관이 제공하고 기자가 엮은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가 2005년 눈빛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때 사진 설명을 적는 일로 함께 자장면을 먹어가면서 밤늦도록 일한 적이 있었다.
가까이서 살펴본 이종찬 위원장은 무서운 국정원장도 아닌, 삼한갑족의 우당 이회영의 손자였다. 할아버지가 전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세우는 데 헌납한 독립운동자 후예답게 합리적이고 학식과 문장력이 뛰어났다.
'왜 임정? 새로운 반일운동 아닌가'라는 일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