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문제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문제를 다룬 진보넷 내용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SNI 차단, 이거 왜 논의해야 하나요? (추재훈)
두 명이 모종의 오해 때문에 싸우고 있다. 둘을 떨어뜨려놓아야 하나? 강압적으로라도 주먹질을 막아야 하나? 일시적으로나마 더 큰 폭력으로 제지해야 하나?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나? 둘이 스스로 오해를 풀도록 지켜봐야 하나? 결자해지라며 기다려야 하나? 어떤 방법을 어떤 순서로 취해야 할까?
해결책은 아주 많다. 기본적으로, 문제부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무수하고, 양상도 그때그때 제각각이다.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수한 해결책 중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뜩이나 문제가 어려운데, 해결책이 단일하지 않으니 이것도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결책의 형태가 크게 두 개로 간단히 분류된다는 점이다.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원인요법,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는 것으로 증상요법이 있다. 두 명이 오해때문에 싸울 때, 원인요법은 어떻게든 오해를 푸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싸움이 격하다면, 우선 떨어뜨려놓는 증상요법이 필요하다.
SNI 차단 방식을 둘러싼 쟁론은 증상요법에 대한 것이었다. 한사성이 SNI 차단에 찬성하면서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고 못박은 것도, 진보넷이 SNI 차단에 반대하면서 당장의 불법촬영물 문제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둘은 원인요법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원인요법은 불법촬영물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불법촬영물의 주 생산자·유통자·소비자들 (주로 남성들)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교육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무슨 여유가 있어 교육으로 사회가 변화길 기다리고 있겠는가. 교육으로 바뀌기나 하겠는가. 지금 당장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5분 뒤에 새로운 피해자가 생긴다면,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나. 원인요법이 중요한지 증상요법이 중요한지 따질 계제가 아니다.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생산·유통·소비자를 처벌하는 것은 범죄 발생 가능성을 없애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증상요법이다. SNI 차단 방식도 마찬가지다.
SNI 차단을 사이에 둔 한사성과 진보넷의 토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논의해야 할 주제가 불법촬영물 제작·유통·소비를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 뿐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단체는 불법촬영물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근원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근원이자 핵심이라는 점은 당연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므로 남성사회의 본질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도 당연하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당장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SNI 차단이라는 방법은 어떤가. SNI 차단 방식에 대한 논의는 지금 당장 발생하고 있는 범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건 명백하게 중요한 문제다. 여기까지가 공론장에 참여하기 전의 생각이다. 공론장은 이게 무슨 문제인지, 중요한지 아닌지를 함께 찾아나가는 장소였다. 틈틈이 "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할까" "우린 무슨 논의를 해야 할까" "무엇이 중요한 문제일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즉,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할지 드러난 증상부터 해결해야 할지를 묻는 자리였다. 두 건의 후기도 마찬가지였다. 한 분은 우리가 왜 SNI 차단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한 분은 우리가 왜 근원적인 문제부터 짚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짧아 물음에서 그쳤다. 접점을 찾을 시간이 부족했다.
접점을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오해 때문에 발생한 싸움을 해결할 방법과 그 순서를 정하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둘의 관계, 오해의 강도, 오해의 주제, 갈등의 배경, 싸움의 심각한 정도 등이다. 이걸 파악해야 원인요법과 증상요법 중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만약 두 명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떼어내야 한다. 그런데 오해가 3초만에 해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된다. 두 명이 서로 아끼는 관계고 싸움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당장 떼어내기보단 진정시키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오해가 몇 년 동안 켜켜이 쌓인 것이라면, 우선 떼어놓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근본을 찾을지, 증상을 돌볼지 정한다면, 해결 방법을 비교적 용이하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SNI 차단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법촬영물 문제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역까지 퍼져있는지, 각 영역의 특성은 무엇인지, 각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양상은 어떠한지,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불법촬영물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SNI 차단을 통해 문제가 어느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지,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SNI 차단이 감청이라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지, SNI 차단으로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이들의 경중을 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배경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알맞은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중을 따질 판단의 기준과 그걸 설득력으로 제시할 근거가 있으면 된다. 그 근거는 지식일 수도 있지만, 사례일 수도, 자신의 세계관일 수도, 중시하는 사회적·도덕적 가치일 수도 있다.
한사성과 진보넷은 배경을 면밀하게 고려해 자신의 주장을 세웠다. 한사성은 지금 당장 발생하는 불법촬영 피해자를 구제하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말한다. 때문에 SNI 차단이 미봉책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필요하다. 진보넷도 당장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SNI 차단 방식으로는 불법촬영 피해자 구제라는 득보다 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강화되는 실이 더 크다고 말한다.
공론장에선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우리가 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지 토론이 진행됐다. 그 다음엔 SNI 차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SNI 차단이라는 증상요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할지 부정적으로 평가할지, 그 근원에 있는 불법촬영물 범죄를 해결할 장기적 방책은 무엇인지 논의되었을 것이다. 진보넷 미루 활동가의 말처럼, 비판을 위해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불법촬영물 문제의 시급한 해결을 위해 어떤 현실적인 방책을 세워야 할지 끊임없이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논의의 기반을 고찰하는 좋은 시작지점을 함께 모색하려 했으나, 논의 시간이 부족해 거기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고든 리빙스턴은 심리치료중에 내담자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변화를 목표로 적극적으로 행동을 변화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행동이란 미봉책일지라도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며, 이런 작은 발걸음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공론장은 '해결책'을 찾는 곳이 아니다. 두 명의 싸움조차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결책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다만 해결책을 찾기 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는 있다. 어쩌면, 그 행동이 해결책이다. 이번 공론장에서 실망한 사람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수많은 실망 속에 해결책의 씨앗이 싹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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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물 SNI차단',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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