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오른쪽)와 반전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왼쪽), 윤봉길 의사의 사진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반전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의 사진은 아카쓰키 센류회(あかつき川柳會) 제공.
김보예
1930년 1월 10일, 쓰루 아키라는 만 21세의 나이로 가나자와 제9사단 보병 7연대에 입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루 아키라가 입영한 제9사단은 상해 판견군의 본부대였다. 즉, 상해의거(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 사변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로 사망한 시와카라 대장과 중상을 입은 우에다 육군 중장이 이끄는 부대였던 것이다.
그해 쓰루 아키라는 7월 일본 공산청년연맹 기관지 <無産青年>(무산청년)을 소지하다 적발되어(가나자와 제7연대 적화 사건), 1931년 6월 13일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가나자와'에서 '오사카'로 이송되어 오사카성 내 '위수형무소'에 1년 8개월간 수감된다.
그와 반대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약 1달간 수감 된 후, 12월 18일 '가나자와'로 이송된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다음날(12월 19일)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위치한 육군 제9사단의 연병장(現,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시 27분에 총살당한다.
윤봉길 의사와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는 1931년 11월 20일부터 12월 18일까지 오사카의 '위수형무소'라는 공간에 28일간 머물렀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이 만났을 확률을 아주 희박하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한・중・일 모두에게 자극을 준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다시 한번 독립 의지를 고취 시켰으며, 중국인들에게는 대일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일제에는 식민 통치의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사건이었다. 때문에, 윤봉길 의사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으며, 다른 죄수들과의 만남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있는 동안에는 독방에 수감 되었기에,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약, 윤봉길 의사와 쓰루 아키라 작가가 만났다면,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 것일까? 이런 대화를 상상해 본다.
"이게 누구요. 윤봉길씨가 아니오. 나 그대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소."
"…."
"내 익히 소문으로 들었소이다. 과묵하다고."
"…."
"그대의 양심은 참으로 솔직하구려. 거짓 앞에 당당하니. 나의 양심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반역자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있소."
"하하하, 성함이 어떻게 되오?"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내 죽기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아군을 만나오."
1934년, 쓰루 아키라의 스승 이노우에 겐카보(井上剣花坊)가 세상을 하직한다. 그때, 그는 긴 추도시를 스승에게 헌시하였는데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ああ、良心よ、良心よ / われわれは愛しいお前のために / 叛逆者の十字架を背負ふ / 彼も、僕も、また君たちも」(아-, 양심이여, 양심이여 / 우리는 사랑하는 그대를 위해 / 반역자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오 / 그이도 나도 그리고 그들마저, 국문 번역 : 필자(김보예))
스승 이노우에를 위한 추도시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에 적히긴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온 생각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윤봉길 의사를 만났다면, 힘없이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노래했던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는 윤봉길 의사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소소한 위안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또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윤봉길 의사의 태도는 쓰루 아키라의 심금을 울렸을지도 모른다.
육군 위수형무소(위수감옥)는 오사카 성 어디에?
윤봉길 의사가 감금되었던 오사카 '위수형무소'는 오사카성 공원, 어디에 있었을까? 오사카 천수각에서 도보 5분 이내에 위치해 있는 '이치반 야구라'(一番櫓)가 있는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