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몽골의 전쟁.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촬영.
김종성
오래도록 이어진 가문 간의 인연이 세간의 관심을 받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당대 역사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친 사례들은 과거에 훨씬 더 많다. 과거엔 가문을 단위로 정치·경제·사회·교육 활동이 이뤄졌으므로 가문간 인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김학의 인연처럼 정권의 이미지나 명운에까지 파급력을 미친 사례들이 적지 않다.
몽골(원나라)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당시, 고려인들은 약 40년간 몽골에 맞서 항쟁했다. 그 시기에 그 누구보다 먼저 친(親)몽골의 기치를 높이 내건 가문이 있다. 지금은 평안도 의주인 인주(麟州) 땅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홍복원 가문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문이 시세에 얼마나 민첩하게 대응했는가는 몽골의 제1차 고려 침공(1231년) 전에 이미 몽골에 항복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몽골군이 거란군을 추격하다가 고려 국경을 넘은 1218년, 홍복원의 아버지이자 인주도령(인주 사령관)인 홍대순은 일찌감치 몽골에 항복을 표시했다.
<고려사> '홍복원 열전'은 "고종 5년에 원나라에서 합진찰랄을 보내 거란 군대를 강동성에서 공격할 때 홍대순이 마중나가 항복"했다고 전한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것도 아닌데, 일찌감치 몽골을 주군으로 모셨던 것이다.
홍복원이 항복할 당시의 몽골 칸(군주)은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인 우구데이가 칸으로 재위할 당시인 1231년부터 고려를 계속 침공했다. 고려에 대한 몽골의 적대적 태도가 공식화되던 이 해부터 홍씨 가문도 적극성을 보였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이 일찌감치 투항을 결정했던 것이다. 홍복원 열전은 이렇게 말한다.
"(고종 18년에) 살례탑(살리타이)이 대거 침입했을 때 홍복원이 마중나가 그 군대에 항복했다."
홍대순과 홍복원은 공통점이 있다. 몽골군이 접근해오자, 미리 '마중나가 항복(迎降)'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민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 가문은 동족들의 가슴에 피멍도 들게 했다. 이 일은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가 주도했다.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이 화친한 뒤인 1271년, 홍다구는 일가친척을 거느리고 진도에 들어가 삼별초 진압 작전을 벌였다. 고려인들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홍다구는 그 다음 해에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문제를 갖고 고려와 몽골을 이간해서 고려 조정을 괴롭혔다.
홍복원 열전에 따르면, 일본 선박이 남해안에 일시 정박하자 고려 지방관이 은밀히 연락해 퇴거를 요청한 일이 있다. 몽골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빨리 돌아가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첩보를 알아낸 홍복원은 고려와 일본의 내통 증거라며 당시 몽골 군주인 쿠빌라이칸(원나라 세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홍씨 가문-몽골 황실 인연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다. 홍대선 때부터 형성된 몽골 황실과의 인연이 홍대선의 손자 홍다구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때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배경으로 홍다구는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다.
홍씨 가문과 몽골 황실의 대를 이은 인연은 몽골이 고려를 견제하는 데 활용됐다. 또 요동(만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몽골 정부가 통제하는 데도 홍씨 가문이 앞장서 나섰다. 몽골이 일본 원정을 추진할 때도 이 가문이 적극 협력했다. 두 집안의 인연이 몽골과 고려·요동·일본의 관계에 파급력을 끼쳤던 것이다.
이 같은 홍씨 가문에 대해 고려인들은 증오심을 품었다. 이 가문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반역 열전' 편에 수록된 내용만 봐도 그런 반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정서는 몽골에 대한 고려인들의 저항심을 축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몽골의 패권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홍다구(1291년 사망)가 살아 있을 당시만 해도 몽골의 국력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반감이 몽골의 패권에 큰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홍씨 집안과 몽골 황실의 인연에 대한 반감은 이 땅에서 몽골의 패권을 조금씩이나마 허물어 트리는 데는 분명히 일조했다.
몰락 직전 몽골과 기씨 집안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