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없이 걸었다 표지
추미전
처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책의 표지, 양 옆으로 중세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흑백톤의 좁은 거리는 고풍스러워 한 번쯤은 걸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걸은 도시가 여긴가 하고 저자를 보니 허수경, 20대 후반 한국에서 2권의 시집을 내고 시작 활동을 하다가 불현듯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어 독일로 떠났다는 시인, 독일 남자와 결혼해 독일에 정착해 살면서도 우리말로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시인은 갑자기 병을 얻어 작년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전해 많은 국내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책장을 넘겨보니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시인의 외로움이 절절히 다가왔다.
낯섬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 질 때까지 살아내는 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 <너없이 걸었다 > 중
90년대 초반, 아직 한국인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기도 전, 머나먼 이국땅에 홀로 발을 디딘 이십대 후반의 시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낯섬을 견뎌내기 위해 시집을 끼고 도시를 천 번도 넘게 걸었다는 시인,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후,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이제는 제법 낯이 익은, 그러나 여전히 고향은 될 수 없는 도시를 독일 시집을 옆에 끼고 다시 걸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곳이 뭐, 그리 대수로운 곳일까마는 가로등에 의지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이 도시에 대한 작은 기록을 적습니다 .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
가로등에 의지해서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집은 독일 뮌스터였을까? 어린 시절 고향 진주였을까?
시인은 독일 뮌스턴 곳곳을 발로 누비며 자주 시인의 고향 진주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뮌스턴의 기차역 앞에서 어린 시절 진주 시골역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역 앞을 서성이던 추억을 떠올리고, 도시를 둘러싸고 흐르는 뮌스터아 강을 따라 걸으며 고향 진주 옆을 흐르던 남강과 강 옆에서 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뮌스터에 유일하게 있는 칠기박물관을 자주 방문한 이유도 고향 풍경의 한 조각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곰방대를 몰고 소를 모는 노인, 버드나무 밑에서 물을 긷는 처녀의 그림,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들이 전복 껍질로 칠기에 수놓아져 있는 곳, 그것에서 시인은 고향의 한 조각을 느낄수 있어 좋았다고 말한다.
내 고향의 풍경인데도 독일의 한 도시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그 풍경은 기묘한 향수와 이국적인 경이감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박물관이 좋았다.
단 한 조각의 고향이 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
- <너없이 걸었다> 중 칠기박물관 앞에서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 위한 책들이 넘쳐나는 지금, 이 책은 여행에 필요한 교통정보, 맛집 정보들이 나열된 가벼운 여행서적은 아니다. 8세기 칼 대제가 파견한 선교사가 이 곳으로 와 수도원을 지으면서 시작됐다는 오래된 도시, 중세에서 근대로, 다시 현대로 이어진 시간동안 뮌스터를 살다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진중한 책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뮌스터가 한층 가까이 느껴져서 시인의 말처럼 언젠가 시간이 나면 독일의 이름난 관광도시들을 섭렵하고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냥 이 도시에 가서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한번 들르세요, 일부러 오기까지는 못하겠지만
이 근방을 지나가신다면 마치 기약 없는 나그네처럼,
훌훌 털어버린 가벼운 어깨를 하고,
그냥 한번,
이렇게 바쁜 세상에,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정말 만의 만의 하나라도 시간이 난다면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
인구 30만에 학생이 5만명이라 '학생도시'라 불린다는 도시,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도시의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다는 '푸른 반지', 18세기 칠년전쟁이 끝난 뒤 도시의 방어벽을 헐고 그 길을 따라 나무를 심어 가로수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도시의 중심가를 둘러싼 4.3km에 나무들이 울창한 가로수길이 만들어졌다.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푸른 반지' 길이 4.3km에 걸쳐 있는 도시라니, 왠지 이런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갈 것만 같다. 이 책은 표지를 벗겨서 접어진 면을 펼치면 뮌스터의 지도가 마법처럼 나타나는데, 이 지도를 보면 도시를 둘러싼 '푸른 반지'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