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 장군> 표지
눈빛출판사
"허형식 열사는 구미 금오산사람이에요."
"네에?"
나는 그 말에 온 몸에 전류가 흐른 듯 전율했고, 동시에 가슴 벅차게 뭉클했다. 그와 함께 내가 이 분을 만나기 위해 수륙만리 먼 길을 왔다는 어떤 소명의식을 갖게 됐다.
일제강점기 허형식과 박정희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어요. 임은동과 상모동은 철길 하나 사이지요."
"네에!"
나는 '임은동과 상모동은 철길 하나 사이'라는 이 선생의 그 말에 또 놀랐다. 상모동은 박정희 생가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순간 비로소 내가 찾던 작품의 주인공을 찾았다고, 마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어떤 황홀경에 빠졌다.
그때 연길의 한 서점에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4 <결전>이란 책을 샀다. 귀국한 뒤 아들에게 그 얘기를 하자 그 책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사진을 스캔해줬다. 그때 나는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오늘까지 서가에 세워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동안 대여섯 차례 허형식 장군을 주인공으로 실록소설을 쓰려고 기필했으나 번번이 탈고치 못한 채 세월만 보냈다.
그렇게 된 연유를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나의 게으름에다가 독립운동사에 대한 나의 무지요,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라는 공간에 대한 나의 공부 부족이요, 중국어와 한자 실력 부족 등이었다.
그런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내 나이 일흔에 이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2014년 10월 5일부터 이듬해인 2015년 2월 14일까지 오마이뉴스에 <들꽃>이라는 제목으로 <허형식 장군> 일대기를 모두 41회로 연재했다. 나로서는 마치 게으름뱅이 초등학생이 방학숙제를 미뤄오다가 개학을 앞두고 허급지급 쓴 작품으로 연재를 마치자 어딘가 작품으로서 성글고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2015년 연말부터 오대산 월정사 명상관에 머물면서 이 작품을 새로 쓰듯이 다시 집필하여 비로소 탈고한 것이 이 작품 <허형식 장군>이다. 탈고한 후 다시 읽어보아도 '대붕(大鵬)을 그리려다가 연작(燕雀)을 그린 꼴'로 매우 미흡하지만 역사에 파묻힌 한 항일파르티잔을 세상 밖으로 꺼낸다는 소명감으로 감히 세상에 이 작품을 내보내고자 했다.
이 작품을 탈고하고도 선뜻 책으로 펴낸 줄 출판사가 없어서 한동안 낙담했다. 이는 내가 이 작품을 성글고 거칠게 쓴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좌우 흑백 이념논리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고자 동북항일연군의 항일투쟁한 것조차도 무조건 백안시하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매카시즘에 절벽을 만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