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해변을 산책하는 주민들. 히잡을 쓴 사람들도 많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의 주요 항구도시 카사블랑카는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의 식민지를 차례로 겪은 곳이다.
최늘샘
모로코에 오기 전의 나에게는, 모로코라는 이름보다 카사블랑카라는 도시 이름이 더 익숙했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세 개를 받은 1942년작 흑백영화. 오래된 영화라 본 적이 없지만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술집과 카페는 세계 곳곳에 있고, 채플린이나 오드리 헵번 마냥 주인공들의 사진도 익숙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아 사용되는 언어인 영어처럼,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수인 코카콜라처럼,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의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모로코를 떠나기 전날 밤, 드디어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모로코 안의 유럽,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Casa branca)는 '하얀 집'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다. 1468년, 베르베르족이 살던 땅에 포르투갈이 침략해 요새를 세우며 형성된 하얀색 마을이 카사블랑카로 불리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뒤 떠났고, 이후에는 19세기 영국 직물 산업의 양모 공급처로 성장했다가 1907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 공군기지가 있었으며,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유럽인들이 비자를 받기 위해 체류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스웨덴 여성과 미국인 남성의 쓸쓸한 사랑을 그린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등장인물들 중에 아랍인은 단 한 명, 도어맨 압둘 뿐이다. 세력을 확장해 프랑스 식민지 카사블랑카까지 들어온 독일군들은 카페에서 나치의 노래를 부르고, 프랑스의 민족 영웅은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저항의 의지를 일깨운다.
잔인하고 차가운 나치에 대항하는 용감한 프랑스와 미국인 주인공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너무나 익숙해진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중반인 1942년 당시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연합군 국가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나치에 분노하고 승전을 기원했을 것이다.
나는 프랑스인도 미국인도 아닌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인이며, 영화에는 프랑스 국가의 가사 자막조차 없었음에도, 합창 장면에서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침략국에 대한 피침략국민의 마음,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저항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프랑스가 아니다. 식민지 피지배국 모로코 땅이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내가 한 침략은 용감한 정복이고 내가 받은 침략은 경악스러운 만행인가. 유럽 강대국들 간의 침략은 나쁘고 제3세계 약소국에 대한 침략은 나쁘지 않은가. 침략 당한 역사를 가진 나라 사람으로서 마음이 불편했다.
프랑스는 곧 나라를 되찾았고, 패전국 독일도 수십 년 간의 복구를 거쳐 다시 유럽의 강대국이 됐다.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남미,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인도양 등지에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 주요 승전국 미국과 영국 역시 마찬가지다. 식민지배는 끝나지 않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인 지배는 식민지배 못지 않게 견고하며 불평등하다.
1942년 당시 모로코의 풍경과 사람들이 어땠을지 궁금했지만, 할리우드 영화 <카사블랑카> 속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공항 장면. 미국인 험프리 보가트는 스웨덴인 잉그리드 버그만과 그의 프랑스인 남편을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이륙을 막으려는 독일 장교를 쏴 죽인 뒤 홀로 모로코에 남는다. 나치 독일을 물리칠 때까지 미국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는 아프리카의 배우를 모른다
카사블랑카라는 지명을 발음하며 새하얀 집들이 자리한 아름다운 항구를 상상했지만, 인구 330만 명이 사는 모로코 최대 도시인 이곳은 교통체증이 심하고 공사 현장도 많아 먼지가 심했다. 도착하자마자 곧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막연히 상상하고 기대하던 것들이 가차없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