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동상전봉준의 동상이 건립된 뒤 나흘 지난 2018년 4월 27일 오후 종각 맞은편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를 찾아 지나가는 이에게 부탁해 기념촬영을 했다.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인도와 지하철 출입구가 있음에도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덕수
2018년 4월 29일 서울로 갔다. 판문점에야 당장 못 가더라도 종로야 작정하면 왜 못 가겠는가. 마침 두릅을 비롯해 이때 시작되는 산나물을 부탁한 이가 있어 택배가 아닌 직접 가져다주기로 작정하고 나섰다.
서울에 도착해 지하철로 을지로3가에 내려 종로를 향해 걸었다. 청계천3가에서 종각을 어림잡아 동아일보 방향으로 거슬러 걷다 종각으로 향했다. 거기에 동상이 있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의 사진을 바탕으로 건립된 동상은 4월 하순의 막 피어난 나뭇잎들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전봉준이 41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에 이르러 남긴 유시(遺詩)를 떠 올려 본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
운거영웅불자모(運去英雄不自謀)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위국단심수유지(爲國丹心誰有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십수 년 전 함양을 갔을 때다. 고부군수로 있을 때 학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게 했던 조병갑의 선정비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조병갑은 물론이고 그 시대 불과 몇 달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던 자들의 선정비와 송덕비들도 봤다. 이 선정비와 송덕비들은 삼남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고르게 남아있다. 그들이 과연 각 고을의 실정이나 제대로 파악했을까 싶은 짧은 기간을 머물고 떠나며 세워진 송덕비나 선정비는 또 다른 수탈의 증거 아닐까.
말 그대로 부임과 동시에 자신의 치적을 후세에 전할 비를 세우는데 사용할 적당한 돌부터 찾게 했겠다. 그리고 글 좀 제법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담은 치적부터 적게 하고 새기도록 하지 않고서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 풍토 속에서 일본까지 야욕을 드러내며 백성들의 원성은 자연스럽게 높아갔고, 전봉준과 같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봉기하는 동기가 됐다. 1차 봉기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 이란 배경으로 탐욕을 일삼던 고부군수 조병갑으로 인해 시작됐다면, 2차는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의 안위를 위한 봉기였다.
조병갑과 관련해 봉기하게 된 동학농민운동사를 여기 옮기기보다 따로 이야기하는 게 옳겠다.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로서 농민운동을 전개했고, 123년이 지나 그가 교수형을 당한 바로 그 날 동상이 건립된 사실이 역사다. 전봉준의 동상 비문의 글씨를 여태명 교수께서 쓰신 일 또한 역사의 한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