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덴마크 견학기행 <꿈틀리 비행기 12호> 단체사진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바토브의 그룬투비 동상 앞에서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오연호 대표와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2019 덴마크 견학기행<꿈틀리 비행기 12호>참가자들
김선희
큰아이 돌 즈음에 이사가서 둘째 아이 돌까지 3, 4년간 살았던 성남의 한 아파트는 남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복도식 아파트의 가장 끝 호수다 보니 복도에 종종 새들이 날아들어 쉬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 한 쌍이 아예 둥지를 틀어 알을 낳고 길렀다. 호기심이 가득한 우리 가족에게 가까이서 비둘기 가족의 삶을 엿보는 흥미진진한 탐구생활이 시작되었다.
가족들 저마다 출퇴근, 등하원 길에 비둘기 가족의 일과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자주 이야기꽃을 피웠다. 작은 아이의 수유를 위해 점심시간에 집에 올 적마다 가누기 힘든 고개를 뻗쳐 들고 애타게 젖을 기다리는 둘째 아이의 힘찬 몸짓이 먹이를 기다리며 입을 쩍 벌리고 아우성치는 아기 비둘기의 모습과 겹쳐서 묘한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간 부부 비둘기의 정성으로 잘 자란 아이 비둘기가 작지만 튼튼한 몸을 이루고 나자 비행 연습이 이루어졌다. 부모 비둘기는 난간에 선 아이 비둘기의 좌우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각각 자리 잡아 어설픈 아이 비둘기의 날갯짓을 침착하게 바라봐 주었다. 언제든 균형을 잃으면 재빨리 다가가 붙잡아 줄 요량으로 보였다.
며칠 지난 뒤 보니 부부 비둘기와 아이 비둘기의 거리는 5미터 남짓으로 벌어졌다. 망설이듯 난간 아래를 바라보다가 힘차게 박차고 날아오르는 아이 비둘기의 첫 비행을 지켜보던 그들의 안도 어린 시선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차츰차츰 거리를 두더니 얼마 후 비둘기 부부는 아이 비둘기가 혹시 균형을 잃고 실수하더라고 날아가 도와줄 수 없는 꽤 먼 거리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이 비둘기를 다시 본 기억이 없다. 가끔 들르는 비둘기 중 하나가 부모거나 아이일 거라고 짐작만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순간에 우리 집에 찾아와준 비둘기 가족은 부모로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이 되었다. 특히, 부모 노릇이 처음인 첫째 아이와의 거리 조정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비둘기 가족이 보여준 모습이 마치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며 마음을 다독이고 안심시켜준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체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느껴오던 아이라 종종 대안교육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스스로 일반학교에 다니고 싶어 해서 보기만 던져줄 뿐 강력하게 권유하거나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좌충우돌 적응해나가는 아이를 보며 아이의 뜻을 믿고 기다린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일반학교에 다녀준 덕에 공교육에 대한 부모와 교사의 마음을 동시에 민감하게 느끼고 알아챌 수 있었다. 지도해준 여러 분의 교사들에게도 나에게도 온통 특별함으로 점철된 아이라서 고감도 부모이고 교사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의 일반고 전입과 동시에 일반고에 입학한 지난 한 해는 제자들과 더불어 가장 큰 동지였고 스승이었다. 1년 동안 아이는 자신의 특별함을 조금씩 지워 나가며 일반적인 고등학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간 무심했던 공부도 꽤 열심히 했고, 두루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도 했다. 그런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던 이 아이만의 개성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 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성적 강박과 강도 높은 정서적 피로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방법을 일일이 지도하지 않던 비둘기 부부의 시선을 떠올리며 아이 스스로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다만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고 갈 수 있는 길도 많다는 것은 알려주고는 싶었다. 그래서 책과 여행을 통해 좀 더 많은 보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리 사회가 똘똘 뭉친 강박과 조금은 다른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