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탈과 식민교육으로 인해 끓어올랐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김이삭
일제는 학생들을 체포하고 광주에서 발생한 두 번의 시위를 외부에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지만, 소식은 나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전해집니다. 그로 인해 박준채와 함께 남파고택에 기거했던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유찬옥이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인 박공근과 함께 나주에서의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고, 11월 27일에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나주학생시위를 전개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시위는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어 전국 각지와 해외까지 확산되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경중 가옥과 옛 나주역 건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재규가 지어서 '남파고택'이라 불리웠던 박경중 가옥은 1884년에 지어진 초가집 형태의 초당채를 비롯해 안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사랑채와 같은 기와집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서 나주의 상류 주택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또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인접해 있는 구 나주역사는 일제강점기 때 지었기 때문에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같은 부분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역무원 마네킹과 함께 과거에 사용되었던 승차권, 통표를 비롯한 철도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 장소 모두 공통점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연관성이 있는 장소라는 점이 되겠습니다. 먼저 남파고택의 경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박준채와 그의 사촌 누이 박기옥, 고종 사촌이었던 유찬옥이 살았던 곳이고, 구 나주역사는 일제 치하에 살았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킨 '나주역 사건'으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남파고택과 옛 나주역사 모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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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나주에서 이 싸움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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