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의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1903~1986.6)이 1976년 원호처에 보낸 청원서. 박시청 선생은 청원서에서 "선친(백암)의 유일한 혈족이자 본인의 누나인 박영애 님께서 팔십이 넘은 고령에다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다"며 "누님이신 박영애가 유족원호 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경정 조치(고쳐서 바로잡는 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보훈처의 모든 기록에서 백암의 친딸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수 없다.
심규상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1859~1925, 아래 백암)의 친딸의 존재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밝혔다. 그런데 백암의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이 생전에 직접 당시 원호처(국가보훈처 전신)에 "백암의 친딸을 원호해 달라"고 청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백암의 친딸의 존재를 파악조차 하지 못한 보훈처의 허술한 보훈 행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 백암의 친딸과 그 후손들이 보훈연금 대상에서 제외되고 기록에서까지 지워진 배경에 의문이 쏠리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백암의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1903~1986.6)이 1976년 원호처에 보낸 청원서 전문을 확보했다. 백암은 <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한 민족사가이자 <황성신문>, 상해 <독립신문>, <한족공보>의 주필, 사장 등을 역임한 민족 언론인이다. 정부는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했다.
백암의 양아들인 박시창 선생 역시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지대장 등을 역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박시창 선생은 1976년 4월 원호처장에게 보낸 자필 청원서에서 자신에 대해 "백암의 후손으로 유족원호대상자로 선정, 별도로 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며 "하지만 (규정상) 이중지원이 안 돼 선친에 대한 원호는 받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선친(백암)의 유일한 혈족이자 본인의 누나인 박영애 님께서 팔십이 넘은 고령에다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다"며 "누님이신 박영애가 유족원호 대상자가 될 수 있도록 경정 조치(고쳐서 바로잡는 일) 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박시창 선생 본인이 독립유공자(독립장)로 별도의 보훈연금을 받고 있어 이중지원이 안 되는 만큼 백암의 보훈연금 등 원호는 외동딸인 박영애가 받을 수 있게 조처해 달라는 청원이다. 박시창 선생은 또 "이는 이역만리 중국 상해에 묻혀 있는 백암의 영전에 바치는 도리이자 정도(正道)"라며 "절차상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협조할 테니 청원을 받아 들여 달라"고 강조했다. (백암의 유해는 지난 1993년 송환됐다)
이 청원서 원본은 한국역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박시창 선생은 이 같은 청원을 제출한 직후인 같은 해 5월, 제 5대 광복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당시 원호처는 무슨이유에서인지 이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암의 유일한 혈족인 박영애(朴英愛1894~1986)가 92세의 일기로 사망하기까지도 아무런 보훈 혜택이 없었고, 오히려 백암의 딸이라는 사실마저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