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농장 사무실에서 백산 선생의 손자와 함께발해농장 사무실에서 백산 선생의 손자와 함께
안민석
발해농장은 백산이 1914년 부산에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던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이를 처분해 만든 곳이다. 그는 4남을 데리고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면서 3백여 가구 농업 이민의 터를 닦았다. 100만 평의 농지에 16km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고 개간해 신화를 썼다.
발해농장을 세운 1932년부터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숨진 1943년까지 10여 년간 안 선생이 실천한 자작농창제는 이주 조선인의 꿈과 희망의 표상이었다. 백산 선생은 조선인들의 독립거점을 마련하여 임시정부 자금을 지원했고 항일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특히 만주국 치하에서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하던 시기에 발해농장은 민족자본가의 상상력으로 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어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백산은 김구, 이회영, 안창호 등 당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발해농장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농장 사무실 옆에 그가 1935년에 세운 발해소학교 학생 수가 한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발해농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행한 현지인은 "모친이 발해농장 사무실에서 일했다"며 "모친 생전에 백산을 무척 존경했다"고 전했다. 그만큼 백산의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다.
백산의 묘를 향해 통곡한 김구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