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파 서민호월파 서민호 선생이다.
김철관
월파는 1921년 중학교 3학년 때(18살) 같은 나이 이화여자고보생인 정희린(1903~1967)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1921년 결성한 조선어연구회가 10년 후인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명한다.
1942년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그해 10월 300여 명을 검거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서민호는 조선어학회 자금조달책이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모진 악행과 고문을 당했다. 300명 중 주동자 33인으로 지목됐고, 그중 27명은 함흥형무소로 이송돼 옥고를 치렀다. 함께 함흥에서 옥살이를 했던 이윤재와 한징, 두 사람은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고, 그는 해방 1년여를 남기고 1944년 2월에 출옥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생각하면서 최근 인기리에 상영한 영화 <말모이>가 생각났다. 특히 조선어학회 직원 중 과거 신세를 졌다는 이유로 무식쟁이 판수(유해진 분)를 직원으로 적극 추천한 조선생(김홍파 분)이 서민호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사한 야쓰다는 창씨를 개명한 조선인 안정묵이었다. 안정묵은 조선어학회 연구위원인 교사 정태진을 조사하며, 모진 고문를 통해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을 불게 한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시절 당시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서민호를 조사한 사람도 바로 안정묵이었다.
서민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이승만 정권
순천평화관 사건은 서민호 당시 국회 내무분과위원장이 1952년 4월 24일과 5월 10일, 각각 진행될 시읍면 선거와 도의원 선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선거일을 앞두고 전남 지역을 시찰하면서 발생했다.
그의 회고록엔 순천평화관 사건에 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여수에서 청중들에게 지방선거의 중요성을 역설한 후, 순천시 영동에 있는 평화관이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내무분과위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정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때, 옆방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있었다. 군인 서창선이다. 호위경관이 서창선을 발견하고 소리치자, 서창선은 당당하게 군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민호를 확인, 4~5미터 거리에서 권총을 빼들고 쏘았다. 총알은 서민호를 적중하지 못했고, 식당 유리창이 깨졌다. 서민호는 위기일발의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권총을 꺼내 그를 쏘아 사살했다. 정당방위였지만 그는 사람을 죽인 것을 자책했다.
이로 인해 57년 7월 1일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60년 4.19혁명이후 그해 27일 국회석방 결의로 8년간 수형생활을 마치고 4월 29일 출옥했다. 특히 순천평화관 사건으로 조사를 했던 악질형사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사했던 안정묵이었다. 서민호는 후일 회고록에서 안정묵이 고춧물먹이기, 비행기태우기, 동지들을 맞세워 서로 뺨 때리기, 얼굴 먹칠해 토끼 뜀 시키기, 발가벗겨 일렬로 세워 때리기 등의 악행과 고문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그는 1961년 5.16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교류론, 남북서신교류 등 통일운동을 하다 구속됐고, 한일협정 비준 파동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 '죽어서도 통일을 보고 싶다, 통일로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해서 거기에 무덤을 썼다. 1974년 통일로 주변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됐다가 지난 2004년 10월 13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지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