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당시 조선고등법원, 경성공소원, 경성지방법원의 모습. 오늘날 종로2가 제일은행 본점 자리다.
도면회
가혹한 법 적용과 오늘까지 이어져온 악법들
한편 「범죄즉결례」 「경찰범처벌규칙」 「조선태형령」은 삼위일체로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옥죄었다. 「범죄즉결례」는 구류, 과료, 벌금, 태형에 처할 죄는 재판소까지 가지 않고 경찰서 또는 경찰분서장을 맡은 헌병장교가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거를 조사한 후 즉시 판결을 선도하는 즉결심판 관련 규정이다. 즉심 대상 범죄는 형법이나 기타 법령에도 많이 규정되어 있지만, 대표적으로 「경찰범처벌규칙」에 87개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항목은 언론·집회, 관권 도전, 위생 문란, 공공건조물·사유물 침해, 사회질서·도로교통 교란, 경제 질서 교란, 부랑 행위, 무허가 의료, 맹수·가축류 방치, 방화·화재 등이다. 이 중에는 오늘날의 경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도 있지만, 단체 가입 권유, '불온' 문서 등의 게시·낭독·반포, 관공서 소환 불응, 경찰관서의 지령·명령 위반 등의 행위도 있어, 조선인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저촉되면 경찰서로 끌고 가 즉결 심판을 내릴 수 있었다.
태형은 위와 같은 경찰범, 3개월 이하의 징역·구류, 1백 엔 이하 벌금·과료에 처해야 할 자 중 거주가 일정하지 않거나 재산이 없다고 인정될 때 실시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태형이 1880년에 폐지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일본은 막대한 감옥 경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국에서 태형을 폐지하지 않고 가능하면 구류·징역보다 태형을 선도하도록 했다. 1910년대 태형이 가장 많이 선도된 범죄는 도박이었고, 그다음이 절도·강도, 삼림령 위반, 사기·공갈, 살인·상해, 경찰범 순서였다.
1910년대 내내 즉결심판을 하거나 조선인을 단속 체포한 것은 헌병경찰이었다. 이들은 법률 소양이 거의 없이 범죄 즉결과 민사 소송 등 사법관 직무를 행했는데, 한국어·풍속·관습을 모르는 자가 태반이었다. 헌병경찰은 조선인에겐 무단정치의 상징으로, 일본 국내의 언론인·정치가들에게도 개혁 대상이었다.
이러한 차별 외에도 1907년 제정된 「출판법」 「보안법」이 조선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출판법」은 "국교를 저해하거나 정치체제를 변혁하거나 국헌을 문란하는", "외교와 군사 기밀에 관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하는" 문서와 그림을 출판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보안법」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론과 행위,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 사주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를 거주지에서 축출하거나 태형 또는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기본권 억압은 1925년 「치안유지법」에 의해 보완되어 조선인의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즉,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을 가진 단체나 개인을 무조건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경찰·검찰은 위의 목적을 입증하기 위해 위에 열거한 특별 규정을 이용해 무기한 장기 구금과 고문을 통해 수많은 학생·노동자·농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억압, 통제했다.
「치안유지법」은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억압 통제해 오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을 가진 단체나 개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법률 모두 '목적'만 입증하면 되기 때문에 무자비한 고문과 장기 구금을 통해 피의자로부터 '목적이 있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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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역사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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