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집시(앙리 루소, 1897,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무지개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지팡이를 꼭 쥔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여인 옆으로 나란히 누운 만돌린, 그리고 지쳐 잠든 여인의 목을 축여 줄 물병이 서 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사자 한 마리가 그녀 뒤에서 꼬리에 바짝 힘을 주고 서 있다. 모래언덕 어디에도 사람의 발자국이나 사자의 발자국은 없다.
사자는 이 여인을 해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주제와 색감이 만나 신비롭고 동화 같으며 고요하다. 이 그림은 앙리 루소가 그린 '잠자는 집시'다. 그는 이 제목 옆에 부제를 달았는데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을 망설인다'이다.
부제를 읽고 나면 더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 그림은 자세히 보면 구도가 좀 이상하다. 사자는 옆모습이 그려져 있어 시점이 정면인 반면 여인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시점이 다르다 보니 잠든 여인은 곧 옆으로 굴러떨어질 듯 보인다. 고의일까 실수일까.
삶이 곧 예술이었던 사람
루소는 평생 그림을 배워본 적 없으며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 없는 '일요화가'다. '일요화가'란, 본업이 따로 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루소는 세관원으로 22년을 일했다. 파리로 들어오는 물건들의 세금을 받는 최하위 공무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통행료 징수 비슷한 거다.
루소는 이 그림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고향 라발시의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붓질을 배운 화가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을 한 점 추천하오니 부디 고향에서 구입해 소장하면 좋겠습니다. 추천작은 '잠자는 집시 여인'입니다. (중략) 가능하다면 천팔백 프랑에서 이천 프랑쯤 받고 싶습니다. (중략) 부디 시장님의 호의를 기대합니다."
안타깝게도 시에서는 답이 없었다. 이 작품은 지금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셀프 추천'이라니. 루소는 엉뚱하고 기발한 사람 같다.
앙리 루소(1844~1910)는 양철장이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누나 세 명과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어린 시절 학업성적이 좋지 않아 두 번의 유급을 당해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19세에 변호사 사무실 급사로 취직했는데, 어이없게 30프랑을 훔쳐서 소년원에 한 달 동안 구금된다. 면죄부를 조건으로 군대에 자원했다. 7년 복무 명령을 받았다. 복무 중인 1868년 아버지가 사망한다. 실질적인 가장이었기에 나머지 기간을 면제받고 돌아와 가족들과 파리로 이사한다. 25세가 된 루소는 18세의 클라망스 부아타르와 결혼한다.
클라망스와 금술이 좋았던 루소는 슬하에 9명의 자녀를 두지만 불행히 모두 일찍 세상을 등진다. 설상가상으로 클라망스마저 37세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딸 쥴리아 한 명만 루소보다 오래 살았다. 클라망스가 사망하고 11년 만에 조제핀과 재혼해 행복을 꿈꿔 보지만 그녀 또한 결혼 4년 만에 먼저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두 명의 부인과 8명의 아이를 잃은 한 남자를 떠올려 보자. 묵묵히 살아내는 게 기적인 삶이다. 그런 그에게 그림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루소의 이력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하고 실력도 상당해서 말년에 바이올린 레슨으로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는 클라망스를 위해 '클라망스,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위한 도입부가 있는 왈츠'를 작곡했다. 이 곡으로 '프랑스 문학과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고 심지어 베토벤 홀에서 연주도 했다.
또한 그는 그림에 부제를 붙이거나 시를 붙여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니 그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뮤지션에 시를 쓰는 시인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으니, 만능 엔터테이너라 하겠다. 삶 자체가 예술이었던 사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는 40세가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49세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퇴직한다.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경쟁하는 '살롱전'에는 출품할 수 없었지만,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전시 가능한 '앙데팡당전'과 '낙선전'에는 꾸준히 참여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조롱하고 멸시했다.
"난쟁이 몸집에다 절구통 머리를 얹어놓고 자화상이라고 제목을 붙인 건 틀림없이 화가가 겸손하기 때문일 것이다."- 1890년 낙선전에 출품한 '자화상'에 대한 기사
"루소의 작품을 보면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단돈 삼 프랑으로 기분 전환하는 방법으론 최고다. 루소는 손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린 걸까?"
"루소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그렸다. 한마디로 하품 나는 작품이다. 그림 내용은 이렇다. 야생사자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웬 여자가 몹시 지쳐 잠들었는데 사자는 그녀를 덮칠까 말까 고민 중이다. 관람객의 배꼽을 뽑는 작품이다. 그림 속의 사자도 어흥 하고 웃을 것이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부디 영광이 있기를." - '잠자는 집시'에 대한 비평기사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살롱전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아카데믹한 그림들은 후대에 빛을 잃었다. 무슨 작품이 어떤 상을 받았는지조차 모른다. 반대로 그늘진 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루소, 고흐, 고갱, 로트레크, 마티스 등의 화가들은 더욱 찬란한 빛을 얻었다. 이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어서야 빛을 보면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죽어서도 빛을 못 보는 사람이 다수다. 이름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무명의 루소를 처음 알아봐 준 사람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자리다. 알프레드는 루소의 그림 '전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그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기고한 글이다.
"화가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모르는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꼭 조롱할 필요는 없다. (중략) 규격에서 벗어나는 건 현대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몽땅 미친 짓, 바보짓이라고 밀어두면 속 편하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회의 어리석은 편견의 제물이 됐다."
알프레드의 소개로 루소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난다. '미라보 다리'를 쓴 기욤 말이다. 아폴리네르는 루소에게 애인인 마리 로랑생과의 커플 초상화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