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NARA / 박도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약산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히려 1947년 초 미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득세한 친일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뺨을 맞는 등 모욕을 당했다. 함께 독립운동했던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동문 몽양 여운형 선생은 그해 여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테러로 사망했다.
약산은 1948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1958년 김일성의 연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고 전해진다.
"약산 찾아 북한에 갈 기회 있었지만..."
미국 영주권자인 김태영씨는 "지금까지 약산의 흔적과 남은 가족들을 찾아 북한에 몇 번은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가면 뭐하나 기분만 나빠질 텐데"라며 "내가 들은 약산의 마지막은 1958년 어딘가에 수용됐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약산의 산소는 북한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북한 정권이라도 약산의 독립운동 업적을 고려했을 때 그냥 없애 버리면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북한에도 애국열사능이 있으니 어딘가에 약산의 묘도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김씨는 이날 진행된 2시간여의 인터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