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신라의 여성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미실, 준정·남모를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같은 자리에 모았다. 그녀들의 환한 웃음이 의미심장하다.
삽화 이찬욱
영화 <이유 없는 반항>과 <에덴의 동쪽> 배우로 잘 알려진 제임스 딘(James Dean·1931~1955). 겨우 스물네 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가 다음과 같은 근사한 말을 남겼다는 걸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고자 하는 건 인간이란 존재만의 특징이다."
다분히 철학적인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제임스 딘이 지적한 바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우리의 오늘을 보다 명확하게 해석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득한 옛날 존재했던 왕국 신라. "그 시절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란 단순하고 소박한 질문에서 이 연재는 출발했다. 여성의 삶을 탐구하는 건 인간보편의 삶을 학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믿음 또한 있었다.
그랬다. 10세기 저편 신라 시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빛과 그림자, 꿈과 환멸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를 짧은 지면에 다 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라의 여인들'에 포커스를 집중해 보편적 신라인(人)의 삶을 조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신라의 역사를 공부하며 그 시대 여성의 지위와 사회활동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았고 활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상·해석학적 교육연구>에 실린 하현진의 논문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에서의 서술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대목이다.
"유교적 여성관이 강조되기 이전 한국 고대 사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공적인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는 물론 그 후대인 고려나 조선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여왕이 세 명이나 등장한다.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정치 분야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왕 이상의 정치적 실권 가진 여성도 존재했던 신라
사실이 그랬다. 신라는 이 땅에 존재했던 어떤 왕조국가에도 없었던 여성 최고 통치자가 3명이나 있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
탁월한 미학관을 갖춘 선덕여왕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당대 남성 엔지니어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줬다. 진덕여왕 역시 실질적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을 왕궁으로 불러 호통을 칠 정도로 드높은 기개를 가진 여성이었다. 진성여왕은 무능력과 성적 타락이라는 학계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재위 기간에 보여준 '사리사욕 없음'은 재평가 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비단 여왕들만이 아니다. 신라 역사에는 왕과 어깨를 견줄만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여성도 등장한다. 바로 '미실'이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하현진의 논문 중 한 대목.
"신라는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남녀 관계는 쌍방향적이고 호혜적이었다. 미실은 색공(色供)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단계적으로 상승시켰고 정치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즉위와 폐위에까지 개입했다. 이처럼 여성이 왕이 될 수도 있었고, 여성 정치실력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라 사회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의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한 인격체로 존중받았고, 남성보다 더 많은 권력을 지니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의 여인들이 정치 분야에서만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고전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신라 시대 대표적 시가로 평가받는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의 주인공인 수로부인은 그 미모가 전설 속 짐승인 용까지 유혹할 정도로 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우리 고대문학에 비밀스런 상상력의 숨결을 불어넣은 매력적인 여성임에 분명하다.
'화랑의 전신'으로 불리는 원화(源花)를 주도했던 두 여성 준정과 남모의 이야기도 여러 가지 함의를 담고 있기에 흥미롭다. 준정과 남모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백 명의 남성을 이끌던 리더십 강한 두 여성이 단순히 '질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을까"란 의문이 생기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기에 오십 살의 나이 차이를 훌쩍 뛰어넘은 소지왕과 벽화의 열정적인 '러브 스토리', 비단 한 필로 언니의 꿈을 사서 태종무열왕의 아내가 되는 문희의 에피소드도 낭만적이다. 동시에 보다 심도 깊은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